전주가 ‘가장 한국적인 맛과 멋의 고장’이라고 자부하는 전주 사람들. 그저 막연히 전주비빔밥과 전주한정식만 머릿속에 넣고 온 ‘서울 촌놈’에게 그들은 진정 전주의 맛을 알려면 이 정도는 둘러보아야 한다며 손을 잡아 끌었다. 전주 토박이가 추천하는 그들의 맛집을 돌아봤다. 황홀한 맛의 순례길이다.
■ 비빔밥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전주 사람들의 기질을 '화이부동(和而不同)', 즉 다른 사람과 생각을 같이 하지 않지만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포용력 있는 이들로 정의하기도 했다. 그들의 화합의 포용력, 하모니 정신은 대표음식 비빔밥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밥 위에 얹어지는 20여 가지 재료의 개성이 어우러져 전주비빔밥 만의 맛을 만들어낸다.
대표적인 전주비빔밥 집은 성미당, 가족회관, 한국관, 풍남정, 종로회관 등이다. 이 중 중앙동에 있는 성미당은 43년 전통으로 주인 정영자(61)씨가 어머니로부터 배운 손맛을 잇고 있는 곳이다.
이곳 비빔밥의 기본 재료인 밥은 육수로 지어낸다. 흰밥을 초벌로 살짝 볶아 내고 그 위에 육회, 표고버섯, 고사리, 취나물, 호박나물, 미나리 등 갖은 고명을 얹어낸다. 맵지도 짜지도 않게 간이 잘 스며든 은근한 맛이 특징. 밥알이 볶아져 나왔기에 숟가락으로 비벼도 잘 으깨지지 않는다. 전주전통육회비빔밥 1만원, 전주비빔밥 8,000원, 떡국 6,000원. (063)284-6595
■ 콩나물국밥
푸짐한 안주는 술을 부르고, 다음날 숙취는 해장국을 부르고. 전주에는 콩나물국밥이라는 시원한 해장국이 있어 과음이 두렵지 않다.
전주콩나물국밥은 '끓여먹는 식'과 '말아먹는 식'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원조는 끓여 먹는 방식. 콩나물과 갖은 양념을 뚝배기에 넣어 보글보글 끓여낸다.
이후 생겨난 방식이 말아 먹는 콩나물국밥인데 전주 남부시장이 원조다. 바쁜 시장 사람들이 뜨거운 국밥을 먹기 번거로워 찬밥에 뜨끈한 콩나물국을 말아준 데서 비롯됐다. 뒷맛이 개운한 남부시장 식 콩나물국밥은 젊은층이 더 좋아한다.
경원동의 왱이콩나물국밥은 남부시장 식 콩나물국밥으로 유명하다. 손님이 벌떼처럼 찾아오라고 "왱, 왱" 하는 벌떼소리를 상표에 담았다고 한다. 뚝배기에 밥과 함께 담아온 콩나물국이 시원하다. 따로 수란이 다른 그릇에 담겨 나온다. 메인 음식 전에 나오는 스프라고 할까.
수란에 뜨거운 국물을 대여섯 숟갈 넣고 김가루를 뿌려 비벼 먹으면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감돌며 속이 든든해진다. 밤새 술에 시달린 위장을 다독이는 데 그만이다. 개운한 국밥에 계피향 은은한 모주까지 한 잔 곁들이면, 이마에선 땀이 주르륵 흐르고 언제 술 마셨더냐는 듯 또 한 잔이 그리워진다. 콩나물국밥 5,000원. (063)287-6979
■ 오모가리탕
한옥마을 옆 전주천변엔 벌써 녹음이 싱그럽다. 전주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물소리와 함께 오모가리탕을 즐긴다. 오모가리는 항아리를 뜻하는 전라도 사투리 ‘오가리’에서 나온 말이라는게 현지인들의 설명이다.
뚝배기에 시래기를 깐 뒤 쏘가리, 메기, 동자개(빠가사리) 등의 민물고기를 넣고 얼큰하게 끓여낸 민물매운탕을 오모가리탕이라 부른다. 음식을 끓여낸 그릇이 요리 이름이 된 셈이다.
전주천변 전통문화센터 옆에 서너집이 몰려있다. 이 중 60년 전통의 화순집이 대표 맛집. 김종희(60) 사장이 친정 어머니의 손맛을 잇고 있다. 오모가리에 말렸다 불린 시래기를 깔고 그 위에 내장을 뺀 민물고기를 얹은 다음 들깻물과 육수를 붓는다.
여기에 민물새우와 통들깨, 다진마늘, 파 등을 썰어넣고 30여분 끓여내면 얼큰한 오모가리탕이 완성된다. 손님이 올 때마다 새로 지어 내놓는 하얀 쌀밥도 오모가리탕의 맛을 배가시킨다. 디저트는 바삭한 누룽지. 밥을 퍼낸 솥단지에서 긁어낸 누룽지가 입안에 구수한 여운을 남긴다. 쏘가리 매운탕 7만원, 동자개 매운탕 5만원(4인 기준). (063)284-6630
■ 완주 순두부
전북에선 완주의 순두부를 알아준다. 시내 완산구 중화산동의 화심순두부는 완주 순두부가 전주에 상륙한 집이다. 2층 규모의 커다란 매장에선 모두부, 순두부, 두우, 콩도너츠, 두부아이스크림 등 콩으로 만든 갖가지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이 집 순두부는 매콤하다. 양념장으로 간을 맞추는 일반 순두부와 달리, 순두부에 매콤한 다진양념을 듬뿍 넣고 팔팔 끓여서 내놓는다. 얼큰한 국물과 부드러운 두부가 어우러진 뚝배기에 밥 한 숟갈 살살 말아 먹는 맛이 일품. 두부돈까스, 콩도너츠, 콩아이스크림 등도 인기 메뉴다. (063)231-6500
■ 한옥마을의 한정식
전주의 대표 관광지로 자리매김한 전주한옥마을에선 서울 삼청동, 가회동 같은 분위기가 물씬하다. 전통한옥 건물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점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고 젊은이들 눈높이에 맞춘 와인카페나, 작고 예쁜 커피숍들도 들어서고 있다.
한옥마을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전주한정식萱?양반가와 궁전. 양반가의 간장게장 한정식 상차림에는 육지와 바다의 진미가 고루 펼쳐진다. 삼합에 굴비구이, 물고기 모양 그대로 내오는 황석어젓에 주인공인 간장게장이 가운데 자리를 차지한다.
최명희문학관 맞은편에 있다(063-282-0054). 경기전 뒷길의 궁전도 맛깔스럽고 고급스러운 한정식 상으로 유명하다(063-284-6760).
■ 백반
전주한정식 못지않은 맛의 정찬은 백반이다. 5,000~6,000원 하는 백반에 30가지의 반찬이 나온다. 반찬 종류만 많은 게 아니다. 그 하나하나의 맛도 빼어나다. 상을 마주하면 "이 성찬을 이 돈 내고 먹어도 되나" 하는 걱정까지 든다.
예전엔 도청 인근에만도 10여곳의 백반집이 성업했다고 한다. 하지만 박리다매로 버텨왔던 집들도 비싼 물가 탓에 하나둘 문을 닫았고, 지금은 중앙동과 완산구청 인근, 전북대 주변에 여나믄 집이 맥을 잇고 있다.
34년의 전통의 중앙동 한국식당이 으뜸으로 꼽히는 백반집. 손님 한 사람에 찌개가 둘, 세 사람이면 셋, 넷이 오면 네 종류가 상에 오른다. 이밖에도 고등어조림, 오징어데침, 고사리무침, 어리굴젓, 조개젓, 파김치, 오이선, 배추김치, 브로콜리데침 등 맛깔스런 반찬이 한 상 가득이다. 백반 6,000원. (063)284-6932
■ 막걸리
전주의 먹거리 중 요즘 상한가를 치고 있는 종목이 막걸리다. 저렴한 가격에 푸짐한 안주로 전주를 대표하는 새로운 명물로 자리잡았다. 막걸리 한 주전자에 1만~1만5,000원을 내면 20여 가지 맛깔난 안주가 상이 좁도록 펼쳐진다. 안주접시 하나하나가 서울 여느 술집 같으면 1만원은 더 받을 거리들인데 이 모든 게 술값에 포함된다고 한다.
기막히게 펼쳐진 산해진미에 “저녁을 괜히 먹고 왔다”는 한숨이 나오고, 막걸리로 취기가 오르면 “<혼불> 의 작가 최명희는 전주를 ‘저항과 풍류의 땅’이라 했다지만 사실은 ‘과식과 포만의 도시’다”라는 복에 겨운 푸념이 절로 나온다. 혼불>
전주시내 삼천동 서신동 평화동 등에 막걸리 타운이 형성돼 있다. 평화동 사거리 뱅뱅뒷골목의 전주막걸리전문점은 젊은층과 여성들이 많이 찾는 곳.
막걸리 한 주전자에 1만2,000원. 따라 나오는 안주는 홍합, 꼬막, 새우튀김, 병어조림, 병어회, 편육, 두부김치, 조기찌개, 데친문어, 꽁치구이, 피조개, 낚지볶음, 게장 등 일일이 세어보기도 힘들다. 김영덕(61) 사장의 손맛에 푸짐한 인심까지 덤이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술 남기는 건 못 참는다.” (063)222-7821
전주=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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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에서 띄우는 편지/ 전주로 맛기행
L형, 우리 그곳에 함께 가시죠.
전주로 맛기행을 떠났다가 발견한 카페인데요, 그곳 맥주잔에 문득 형의 얼굴이 오버랩됐습니다. 완산구 경원동의 골목길에 자리잡은 허름한 건물 2층의 ‘새벽강’이란 곳입니다. 빨간 간판엔 상호보다 ‘술’이라 크게 쓴 글씨가 훨씬 도드라져 보이는, 술꾼을 위한 공간입니다.
전주의 문인, 소리꾼, 화가들의 아지트란 얘기를 듣고 찾아갔습니다. 20여명이 앉을 만한, 그리 넓지 않은 그곳엔 어둑한 조명 아래 담배연기가 자욱했고, 주거니 받거니 술잔 오가는 소리로 북적였습니다. 마침 비어 있는 테이블에 앉을 수 있어서 살점 두둑한 북어포를 뜯어가며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한쪽 테이블에서 지긋한 노신사가 일어나더니 “노래 한 소절 불러도 좋겠냐” 하더군요. 모두들 박수로 청했고, 청아한 가락이 흘렀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이번엔 그 옆 테이블에서 그림을 한다는 젊은 분이 일어서서는 깊고 굵은 목소리로 흥겨운 민요를 불러 제꼈습니다. 창가에 있던 북과 꽹과리, 징이 흥을 돋웠고, 어깨를 들썩이며 쳐대는 손뼉 소리가 추임새가 되었습니다.
노래에 감동한 어떤 분은 그쪽 테이블로 맥주 3병을 보내며 인사를 했고, 흥을 돋운 그 가수는 컬컬한 목을 축이며 고마워했습니다. 테이블을 돌며 장기자랑은 이어졌고 노래를 못하는 이들은 우스개소리로라도 흥을 이어갔습니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인데도 달뜬 분위기는 좀체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그 몽롱한 자유 속에는 “쓰잘 데 없는” 정치 얘기, 부동산 얘기가 끼여들 틈이 없었습니다. 대신 모두들 음악을 이야기하고 그림을 논했습니다. 그 소리들이 제겐 모두 시처럼 들려왔습니다.
문득 10여년 전 서울 인사동의 ‘연못’이나 피맛골의 ‘시인통신’에 앉아있던 제가 떠올랐고, 그 곁을 언제나 함께 했던 형이 생각났습니다. 제가 보냈던 서럽고도 유쾌했던 그 청춘 말입니다. 술에 절고 사람에 젖던 그 시절. 한껏 취기가 올라선 바다가 보고파 무작정 동해로 향하곤 했던 그때가 기억나십니까. 혹시 잠시라도 저와 함께 그때로 돌아가보고 싶지는 않으신지요.
시간 한 번 내 주십시오. 이번엔 제가 쏘겠습니다.
L형, 우리 그곳에 함께 갑시다.
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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