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해변의 카프카> 를 읽다 보면, 마치 선사시대부터 쭉 인간 세상과 격리된 듯한 숲과 그만큼 오래 묵은 통나무집이 등장한다. 주인공 다무라 카프카가 진한 녹색의 로드스터를 타고 들어가 나흘 간의 은둔을 경험하는 곳이다. 해변의>
전화가 터지지 않고, 조명이라곤 별빛과 숲이 쏟아내는 어둠 뿐인 통나무집. 침묵의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깊은 정적이 완벽한 은둔 환경을 만들어 준다.
나침반 없이 숲으로 향하면 영영 길을 찾지 못할 정도로 복잡한 자연의 은신처에서 주인공은 알몸을 빗줄기에 맡긴 채 문명의 때를 벗기도 한다. 프린스의 음악을 들려주던 워크맨의 배터리가 닳아버려도 비문명의 고요가 두렵지 않은 은신처.
복잡한 현대를 산다는 이유로 우리는 가끔 세상과 동떨어진 공간에서의 은둔을 꿈꾼다. 그래서 나온 말이 ‘은둔여행’이다. 골치 아픈 프로젝트를 끝낸 직장인, 우울증에 빠진 주부 등등 사회적 관계를 잠시 접고 오롯이 홀로 있고 싶은 사람이라면 은둔여행을 즐길 자격은 누구나 충분하다.
도시의 삶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각종 목적의식으로 차고 넘치는 기성복 같은 여행이 아닌, ‘쉼표와 치유’ 만으로 이뤄진 여행을 떠나보자.
“타이 사무이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적막한 섬에 머물 때였죠. 그곳은 관광객 뿐 아니라 주민들도 별로 없어 밤 10시만 되면 섬 일대에 전기가 끊깁니다.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든 어두운 해변의 카페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자니, 우주가 구체적으로 다가왔어요. 좀 뚱딴지같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세상으로부터 잠시나마 격리된 그때, 삶과 죽음에 대해 복잡한 생각이 정리됐죠.”
윤용인ㆍ노매드 트래블 대표
“캘리포니아의 사막에서 바지를 내리고 앉아서 볼일을 봤죠. 아무도 없는 그곳, 완벽하게 세상과 격리된 사막 한가운데에서 그러고 있자니 머릿속을 가득 메웠던 질문의 답들이 쾌변처럼 쏟아졌죠.
이젠 삶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명쾌한 명제가 만들어졌고요. 숙제를 끝냈다는 기분에 다음날 바로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왔죠. 정말로 권하는데, 한번쯤 오지에 들어가서 변을 보세요. 제 말뜻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캠프장에서 그러면 안 되고요.”
강산에ㆍ가수
은둔여행은 이들이 경험했듯 마치 유체 이탈을 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나 느낄 수 있을, ‘나를 남 보듯’ 하는 체험을 가능케 한다. 주위를 둘러본들 내가 틀어박힌 자연경관과 자신밖에 보이는 게 없으니 자연히 시선은 ‘나’를 향하고 그 시선은 나를 감싸고 있던 문명의 외피를 도려내 준다.
케케묵은 고민에 대한 답이 의외로 쉽게 찾아진다. 상처가 치유되고, 최소한 지금까지 사용한 적이 없는 생각의 근육들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다. 횡으로 종으로 얽힌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지켜보는 경험은 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짜릿하게 다가온다.
“정신없이 바빴던 무언가를 끝냈을 때, 은둔여행을 떠올리면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껴요. 우리나라는 섬이 많은 장점이 있잖아요. 섬은 그냥 그 자체로 은둔의 이미지가 강해요. 육지와 떨어진 그곳, 그 중에 아무도 나를 찾아내지 못할 것 같은 여서도 여행을 추천하고 싶어요. 그런데 문제는 세상 어딜 가도 휴대폰은 터진다는 거죠.”
채지형ㆍ여행작가, SK커뮤니케이션즈 차장
은둔여행이 필요한 순간은 스스로 감지할 수 있다. 만일 삶 속에서 여유와 지루함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당장 세상으로부터 ‘짱박힐’ 계획을 세워보자. 얼마나 각박하게 살고 있으면 그나마 찾아온 여유를 지루함으로 엿바꿔 먹을까. 작심을 했다면 나에게 맞는 은둔지를 찾아내야 한다.
“일단 떠들썩한 패거리 여행은 안 되고요, 외로움과 한적함이 적당히 조화를 이룬 장소를 찾아야죠. 딱히 어디로 갈지 모른다면 전국에 산재한 휴양림의 오토캠핑장을 선택해보세요.
짐을 풀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콘도나 펜션을 선택하면 숙소를 베이스캠프 삼아 주변 관광에 몰두하는 습성이 있어요. 이러면 진정한 은둔여행이 안 되죠. 이런 면에서 오토캠핑이 좋아요. 템플스테이나 피정은 좀 조심스러워요. 그 안에도 룰이 엄격하니까 진짜 은둔은 아닌 것 같아서요.”
양영훈ㆍ여행작가
양홍주 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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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둔, 조금은 겁나죠… 책·라디오·랜턴 챙겨떠나요
꼭 챙길 것도, 반드시 빼놓을 것도 없다. 꽉 조여진 삶의 현을 느슨하게 풀러 떠나는 길, 뭘 하고 말고 따위의 강박은 부질없다. 여여한 마음과 넉넉한 시간이면 족하다. 하지만 무위(無爲)의 여유가 두려운 것도 사실.
늘 은둔을 꿈꿨지만, 그 은둔은 관념 속에 은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겪어보지 못한 은둔은 쑥과 마늘의 동굴처럼 어둑시근하다. 이런 이들을 위한 비상용 은둔 키트를 소개한다. 말하자면 이건, 은둔에 가슴 떨리는 이를 위한 우황청심환이다.
▲ 책
질마재 너머 바닷가 외할머니의 추억(서정주의 시집 <질마재 신화> ), 3대째 종가를 지켜내는 여인들의 인고의 세월(최명희의 소설 <혼불> ), 내리쬐는 햇볕 때문에 방아쇠를 당기는 생의 모순(카뮈의 소설 <이방인)) …. 모두 까맣게 잊고, 보고서, 고지서, 계약서만 들여다보고 산 지 오래 됐을 것이다.< p>이방인))> 혼불> 질마재>
일상을 잠시 벗어나는 길, 책 몇 권 챙기지 않을 수 없다. 재테크 비법이니 경제경영서니 하는 금속성 책은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킨다. 아득히 먼 옛날 베갯모를 적시게 만들었던 책, 혹 묵은 숙제처럼 '언젠가는 읽어야지' 했던 책이 제격이다.
▲ 라디오
선방(禪房)에 절구통처럼 들어앉을 작정이 아니면 긴긴 침묵과 고집스레 대면하느라 진을 뺄 필요 없다. 격리의 공간에서 가장 요긴한 문명의 이기는 라디오. 되도록 스피커가 달린 것이 좋다. 풀벌레 소리가 섞인 모노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음향은, 수천만원짜리 하이파이에서도 기대할 수 없었던 안식을 준다. 추천 채널은 KBS 클래식FM(수도권 93.1㎒).
▲ 가스랜턴
문명의 불빛이 멸절된 곳으로 떠나는 것이 은둔여행의 참맛이다. 하지만 배를 바닥에 대고 누워 시집이라도 뒤적이려면 조명은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전기 랜턴을 켜면 무드가 팍 죽는다. 화력 조절 레버로 빛의 부피를 삭일 수 있는, 가까이 귀 대면 '소소소' 소리를 내며 타는 가스 랜턴이 제격이다. 그 빛을 보고 달려드는 날벌레를 쫓는 것도 은둔거사의 운치.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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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유와 자유 찾아 어디로 숨어볼까
은둔여행으로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면 ‘어디로’ 숨어야 할까. 세상과 일시적 단절감을 느낄 수 있는 은둔지를 여행전문가들의 도움말로 소개한다.
■ 섬 - 단절이 너를 자유케 하리라
섬은 하루 서너 차례만 배가 들고 나는 교통의 한계 만으로도 물리적 고립감을 느끼기 충분하다.
여행 고수들은 ‘숨을 만한 섬’으로 충남 보령시 원산도를 많이 추천한다. 서울에서 4시간 가량 걸리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가 큰 장점이다. 대천항에서 30분 정도 걸리는데 여객선이 하루 5번 왕복한다. 긴 해안선을 따라 발달한 해식애가 눈길을 잡고 풍부한 해산물이 입맛을 당긴다.
경남 통영시 외초도는 문자 그대로 잠행을 감행키에 안성맞춤이다. 욕지도 밑에 있는 조그마한 섬으로 주민은 단 2명. 정기적 대중교통 편은 물론 없고, 소형 통통배를 빌려야 입도 가능하다. 욕지도에서 10분 거리다.
경남 거제시의 지심도와 전남 완도군의 여서도 등도 은둔의 자유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좋은 섬들이다.
■ 낚시터 - 고독마저도 감미로운 공간
침묵이 미덕으로 통하는 낚시터도 은둔여행지로 좋다. 멀찍이 떨어져 앉은 강태공들 사이로 흐르는 적막이 사색의 깊이를 더한다. 특히 물 위에 떠 있는 수상좌대는 은둔여행자에게 최적의 공간이다. 간단한 생필품만 챙겨 들어가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고독을 즐길 수 있다. 일종의 ‘미니 수상가옥’인 셈.
수상좌대가 갖춰진 낚시터로는 경기 안성시 고삼지가 유명하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섬> 의 촬영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수상좌대 130개가 3,102㎢ 넓이의 호수에 점점이 뿌려져 있다. 1박에 6만원. 끼니는 5,000원 하는 백반 배달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섬>
고삼지와 가까운 안성시 금광지도 가슴에 적막감을 품기에 좋다. 도로에 인접해 교통이 편리하다. 인근에 소문난 맛집과 고급 숙박시설이 즐비하지만 수상좌대에서의 잠자리는 그 모든 것을 침묵시킨다.
■ 휴양림 - 몸이 원하는 싱그러움
휴양림은 마음보다 몸이 먼저 끌리는 은둔지다. 하늘로 쭉 뻗은 나무 사이를 홀로 걸으며 사색에 취해도, 아무 벤치에 앉아 독서에 빠져들어도 좋다. 숲이 있고 사람이 있을 뿐, 마음 가는대로 발길 닿는대로 자연을 만끽한다.
전북 무주군의 덕유산 자연휴양림은 오지의 고립감과 숲의 싱그러움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곳. 울창한 낙엽송과 잣나무가 하늘을 가린다. 가장 작은 방갈로의 숙박비는 주말ㆍ성수기에 5만5,000원. 진정한 은둔여행을 추구한다면 하루 2,000원으로 야영장을 이용하는 것도 좋다.
충남 보령시 오서산과 경기 포천시 운악산, 강원 인제군 방태산, 홍천군 삼봉, 경북 청도군 운문산, 충북 단양군 황정산 등도 대표적인 자연 휴양림이다.
■ 피정 – 경건하고도 여유로운 잠행
경건한 마음으로 차분히 머리를 식히고 싶다면 종교시설에 기댈 만하다. 가톨릭단체 등이 운영하는 피정 프로그램이 유용하다. 불교의 템플스테이는 정해진 틀이 다소 엄격해 자유로운 은둔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제주 한림읍의 성이시돌 피정센터는 휴양지의 여유로움에 종교적 경건함이 곁들여진 곳이다. 가톨릭 신자가 아니어도 이용할 수 있다. 미사 등 정해진 종교행사가 있지만 굳이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 3박 4일에 항공료 포함 34만9,800원이 든다(7, 8월 등 성수기엔 38만9,000원).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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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심 속 은둔·사색… 망우리공원의 재발견
세상과 동떨어질 수 있는 은둔의 공간은 반드시 낯선 땅, 먼 곳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여행작가 이종원(43)씨는 우리의 삶과 역사적 인물들의 죽음이 공존하고 있는 망우리 공원(서울 중랑구 망우1동)을,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가 모르는 도심 속 은둔지로 추천한다. 그가 그곳을 다녀왔다.
망우리 고개에 올라서면 기분이 묘하다. 빽빽한 무덤 옆엔 아파트가 뺑 둘러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공간에서 망자의 슬픔과 마주하면 오늘의 근심은 먼지처럼 느껴진다. ‘망우리(忘憂里)’란 지명도 조선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능지를 둘러보고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인 이곳에서 “이제야 근심을 잊었구나”라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망우리 공원에는 산중턱을 깎아 만든 5.2km의 산책 코스가 있다. ‘사색의 길’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숲이 무성하고 평탄한 길이어서 어린이, 노약자가 오르기에도 부담이 없다. 순환로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도는 것이 좋은데 평탄한 길부터 시작해야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소나무, 벚나무, 아카시아나무 등 다양한 수종과 화려한 봄꽃을 볼 수 있으며 능선을 따라 이어진 S자 곡선길이 일품이다. 요즘은 철쭉과 붉은병꽃나무가 한창인데 5월의 신록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사각정에서부턴 역사적인 인물들의 묘역을 만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었던 죽산 조봉암, ‘님의 침묵’의 시인 만해 한용운,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 우두를 발명한 송촌 지석영,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 화가 이중섭 등이 이곳에 묻혀 있다. 묘역 입구에는 이들을 소개한 시비 등도 놓여 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한용운의 시 ‘사랑하는 까닭’). 만해의 묘는 망우리공원 정상 부근에 정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의 시비 앞 벤치에 앉아 오래고 진실된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며 책장을 넘겨보는 것은 어떨까.
파란만장한 생을 마치고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 이들의 넋을 기리며 걸어본다. 길가에 핀 이름모를 꽃들이 살랑이는 바람에 흩날린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이 저승에서나마 꽃길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기를.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내려다보며 세상만사 아등바등 매정하게 살 필요가 있을까, 상념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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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신상순기자 s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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