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주일학교의 변천, 천도교중앙대교당의 역사 등을 통해 1900년대 종교와 사회상을 되짚어볼 수 있는 책이 잇따라 출간됐다.
서울 연지동 연동교회(담임목사 이성희)가 펴낸 <연동주일학교 100년사> 는 한국장로교 최초 주일학교인 연동교회주일학교의 역사를 담아 개신교 발전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1894년 창립한 연동교회가 평양대부흥이 일어난 해인 1907년 소아회(小兒會)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주일학교는 개신교 교세확장의 첨병 역할을 했다. 연동주일학교>
1914년 연동교회 전체 교인수가 700명일 때 소아회 어린이는 921명이었다. 3년 후인 1917년 교회 예산의 39%가 주일학교에 쓰였고 교사 수 만도 57명이나 됐다. 당시 새문안교회 승동교회 남문밖교회 안동교회 등의 주일학교가 인기였다.
1921년 YMCA 강당에서 열린 전국주일학교 대회에는 5,000명 이상이 모여 대성황을 이뤘으며, 이때부터 교회에 주일학교가 설립되는 것을 당연시 여기게 됐다.
주일학교는 일제 말의 교회 탄압과 6ㆍ25전쟁 등으로 시련을 겪다 70, 80년대 크게 확충됐으나 최근 들어 개신교세가 줄어들면서 주일학교 학생수도 감소하고 있다.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선포한 3세 교조 손병희 선생이 종교로서의 정체성 확보를 위해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세운 천도교중앙대교당은 1921년 2월 준공된 이후 명동성당, 조선총독부청사와 함께 서울의 3대 건물로 꼽혔다. <천도교중앙대교당 50년 이야기(1921~1971)> (모시는사람들 발행)에 따르면 대교당의 건축성금 중 일부는 3ㆍ1운동의 자금으로 들어갔고, 1923년 4월 소년운동협회가 조직돼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 운동을 이곳에서 시작했다. 천도교중앙대교당>
1925년에는 조선 초유의 전조선기자대회가 열려 언론자유를 외치는 등 1920, 30년대에 대교당은 종로에 있는 중앙기독교청년회관(YMCA)과 함께 민족운동단체들의 단골 집회 장소였다. 일제 말에는 군피복공장으로 징발을 당하고 6ㆍ25때는 일부 파손되는 등 수난을 겪었으나 원형이 보존돼 격동했던 한국현대사의 흔적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남경욱기자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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