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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대통령의 한 마디

입력
2008.05.06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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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청와대 비서관 내정자를 면담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엘리트였던 내정자는 자신의 업적과 경력을 한참 얘기했다. 대통령이 비서실장에게 한 마디 했다. “저 친구 나이 때 나는 뭐하고 있었지?” 실장의 답변. “야당 신민당의 원내총무였습니다.” 대통령이 “아, 그랬나”하는 순간 내정자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면서 진땀을 흘렸다.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는 ‘겸손한 처신’을 새 인생관으로 삼고 있다. 말에 어눌했다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이야기다.

말과 문장에서 ‘교과서 급(級)’이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래서 오히려 어록(語錄)이 별로 없다. 기자들로부터 ‘그의 입에서 나온 것 가운데 숨 쉬는 것 빼고 모두가 베껴 적으면 그대로 기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앞이나 옆에 있으면 속담이나 금언에서 유명 석학들의 지론까지 동서고금의 진리를 언제나 경청할 수 있었고, 대개 상대의 표현과 의중을 넘어서 있었다. 말을 전하는 것보다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언론의 할 일이었다.

■ 감동·공감을 부르는 ‘촌철살인'

대통령의 ‘촌철살인(寸鐵殺人)’이 난무했던 시기는 노무현 전 대통령 때였다. ‘짤막한 경구(警句)로 사람의 마음을 찔러 감동시키는 것’이라는 원론적 의미를 생각하면, 그만한 대통령이 없었다. 지금도 생생한 한 마디가 있다. 임기 초 검사들과의 대화에서 “그렇다면 한 번 해보자는 거지요?”라는 질타였다. 이 한 마디의 ‘철(鐵)’은 당시 토론장소에 나왔던 혈기왕성한 젊은 검사들의 등골을 서늘케 했음은 물론, 대통령 임기 5년 내내 검찰조직을 ‘살(殺)’하기에 충분했다.

대통령의 한 마디가 무겁지 않을 순 없겠으나 그것이 한 개인이나 특정 집단을 겨냥했을 경우 그 파괴력은 또 다르다. 문민정부 이후 대통령의 말이 자주 “…”로 전달됐고, 특히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적나라한 발언들이 그대로 노출됐다. 노 전 대통령은 말을 많이 했고, 말로 인해 불필요한 미움과 오해를 많이 샀다고 한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보다 매사에 더 많은 양의 말을 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경우 한 개인이나 특정 집단을 향해 언급한 말들이 정제되지 않은 “…”로 시중에 나돌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부작용을 불렀다.

이명박 대통령의 “…”가 벌써 논란거리다. 임기 초 대통령의 발언들은 국민이 5년 내내 갖게 되는 정권의 이미지를 확정한다. 임기 중반이나 후반에 하는 말들은 이미 형성된 선입견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여 들리기 마련이다. 이 대통령의 “…”들은 좀 자극적이다. CEO 출신이기에 개인과 관계집단의 속성을 잘 파악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그들을 즉각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을 주는 장점은 있다. 하지만 그 말이 일반 국민과 다른 집단의 공감을 얻는 데는 무리가 없지 않다.

축산농가를 방문하여 한 말, “축사의 소가 비상등을 보고 대피하느냐”는 현장의 소방행정 담당자에겐 ‘촌철살인’의 질타가 되겠으나 농가의 입장에선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들었다. 쇠고기 수입 개방과 관련하여 “도시근로자와 소비자들이 값싼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발언도 경영의 대차대조표만 생각했다는 인식을 지울 수 없다.

아동 성폭행 사건 때 갑자기 일산경찰서를 방문, “화가 나서 뛰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을 때, ‘그래서 뛰어간다면 하루 24시간 뛰어도 모자랄 것’이라는 생각들도 적지 않았다.

■ 당사자보다 국민 더 의식해야

이미 대통령의 말은 아무런 여과 없이 시시각각 전달되고 있다. 요즘의 말들로 인해 앞으로 5년간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형성될 것이다. 대통령의 한 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찔러 감동시키는 것’이어야 함은 물론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눈앞의 대상보다 그 뒤, 그 주변, 그 밖에서 전해 듣는 모든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어야 ‘촌철살인’이 될 수 있다.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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