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여행하는 한국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 코스인 지브리 미술관에 가려면 도쿄 미타카(三鷹)시에 있는 미타카역에서 전차를 내려야 한다. 일본 헌법기념일(제헌절)인 3일 한 시민단체가 그 역 앞에서 ‘헌법 9조를 지킬까 바꿀까’를 묻는 약식투표를 실시했다. 하얀 보드의 빈 칸에다 동그란 스티커를 붙이는 방식의, 흔히 보는 이 간이조사 결과 헌법 9조를 지키자가 467표, 바꾸자가 67표였다.
평화헌법 수호론이 대세
군사력을 갖지 않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헌법 9조를 지키려는 일본인들의 생각은 아사히(朝日)신문 여론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신문이 최근 2,0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헌법 9조를 바꾸지 않는 것이 좋다’고 답한 사람이 66%로 ‘바꾸는 것이 좋다’(23%)보다 훨씬 많았다. ‘호헌(護憲)’ 인구는 헌법 개정에 열을 내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 시절인 지난해 4월 실시한 여론조사 때보다 20% 포인트 가까이 늘었다.
이런 여론에도 불구하고 개헌 움직임 또한 만만치 않다. 집권 자민당은 자위군을 명시하고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허용토록 헌법을 개정하자는 게 당론이다. 최대 야당인 민주당도 집단적 자위권 도입에 찬성이다. 일본 국회에서는 지난해 헌법 개정을 검토하는 헌법심사회가 설치됐고 ‘새헌법제정 추진동맹’이라는 의원 모임도 최근 활동에 의욕을 내고 있다.
일본 시민단체와 반전평화 운동가들이 주도해서 4, 5일 지바(千葉)시에서 열고 있는 ‘헌법 9조 세계대회’는 이런 일본사회의 보수화 흐름에 반대하는 여론의 적극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대회가 각별한 것은 일본 헌법 9조의 평화 정신을 일본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시민단체와 연대해서 지키겠다고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헌법 9조가 전후 일본인과 아시아인의 신뢰관계를 만들어가는 초석이었다’는 일본 시민단체의 대회 참가 요청을 한국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를 비롯해 참여연대, 평화네트워크 등의 대표들이 40명 이상 이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이런 시민 연대가 물론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일본 우익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비판하면서 최근 수년 사이 유행처럼 번진 한일 학자, 교사, 시민단체의 공동 역사교과서 만들기도 값진 한일 연대였다.
‘제1항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으로서의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영구히 이를 방기(放棄)한다. 제2항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ㆍ해ㆍ공군 그 밖의 전력은 이를 보지(保持)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交戰權)은 인정하지 않는다.’
과거 잊는 신시대는 공허
일본 헌법을 제정 이후 61년 동안 ‘평화헌법’이라는 아름다운 별명으로 부를 수 있게 한 9조를 지키고 그 정신을 세계에 발신하기 위해 한일이 손잡는 것만큼 값진 연대도 없을 것이다. ‘한일 신시대’는 무역이 활발해지고 젊은이들의 왕래가 잦아진다고 해서 그냥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지킬 것을 지키고, 버릴 것을 버리기 위해 한일 시민이 토론하고 손을 맞잡아야 한다. 그냥 과거사를 잊자고 해서는 한일은 신시대를 향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김범수 도쿄특파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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