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세돌인가. 그 해답이 바로 이 한 판에 있었다.
지난 달 30일 중국 상하이 왕바오호텔에서 열린 제 6회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본선 1회전(24강전)에서 이세돌과 박영훈이 각각 중국의 후야오위와 대만의 저우쥔쉰을 잡고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이영구는 시에허에 져 탈락했다.
특히 대회 개막 전부터 국내외 바둑 언론 매체에서 우승 후보 '0순위'로 지목됐던 이세돌은 작년 LG배서 준우승을 한 난적 후야오위를 맞아 오전 10시 30분(한국 시간)부터 저녁 7시 45분까지 장장 9시간 넘게 계속된 혈전 끝에 마법 같은 '흔들기'를 선보였다. 결국 마치 거짓말 같은 역전승을 일궈내 전세계 바둑팬을 열광케 했다
이 날 바둑은 초반부터 이세돌이 좋지 않았다. 백을 쥔 이세돌은 포석에서 매끄럽지 못한 행마로 위기를 자초했고 중반 들어서도 후야오위의 두터움에 밀려 특유의 날카로움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
우변 전투에서 대마가 크게 공격 당해 거의 빈사 지경까지 이르러 팬들의 애간장을 태우더니 결국 좌하귀에서 패싸움 끝에 하변 대마가 몰살 당해 일찌감치 패색이 짙었다.
그러나 이 때부터 이세돌의 무시무시한 대반격이 시작됐다. 과거 '전신' 조훈현이 전성기 때 특유의 '흔들기'로 아무리 불리한 바둑이라도 기적 같이 역전시켰던 것처럼, 어린 시절 '리틀 조훈현'이라 불렸던 이세돌은 좌상귀에서 벌어진 패싸움을 빌미로 삼아 계속 최강수를 던지며 엄청난 뒷심으로 바둑판을 마구 흔들어 댔다.
사이버오로와 타이젬, 바둑TV 등에서 이 바둑을 생중계 해설하던 원성진 유창혁 백성호 등 내로라 하는 해설자들마저 "이세돌의 착수가 도무지 예측 불허여서 도대체 바둑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정신이 없다"고 실토할 정도였다.
이세돌의 불꽃 투혼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일까? 후야오위가 계속 한 발짝 씩 물러서면서 '흑 절대 우세'였던 형세가 차츰 '다소 유리'로 변했지만 안타깝게도 반면 10집 정도의 차이는 더 이상 좁혀지지 않았다. 어느덧 종국이 가까워지자 국내 해설자들은 모두들 "도저히 역전이 어려울 것 같다"며 비관적인 전망을 내렸다.
그러나 이날 승리의 여신은 이세돌 편이었다. 응씨배는 대회 창설자인 잉창치가 개발한 이른바 '응씨룰'을 따르는데 응씨룰은 덤 8점(집)에 초읽기가 없는 대신 각자 생각 시간 3시간30분을 다 쓰고 나면 35분을 초과할 때마다 벌점 2점(집)을 부과한다. 바로 이 규정이 이세돌을 살렸다.
후야오위는 중반 무렵부터 상대의 혼을 뺄 듯 좌충우돌 정신 없이 흔들어 대는 이세돌의 맹반격에 새가슴이 됐는지 중요한 고비마다 자신 있게 착수를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다 시간을 너무 많이 써서 무려 세 번이나 벌점을 받아 무려 6점(집)을 공제 당하고 말았다.
결국 321수에 바둑을 끝내고 계가를 해 보니 후야오위가 반면 9점을 남겼지만 덤 8점에 벌점 6점까지 제하고 보니 반대로 이세돌이 5점(집)승을 거두었다. 이세돌로서는 정말 천신만고 끝에 거둔 값진 승리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이세돌이 바둑은 지고 승부에 이겼다"고 했지만 이는 치열한 승부를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데서 비롯된 오해다.
이 날 바둑의 흐름으로 볼 때 응씨룰을 적용하지 않고 초읽기를 했더라면 오히려 후야오위가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중간에 시간패를 당했거나, 아니면 시간에 쫓긴 나머지 집중력 부족으로 큰 실수를 저질러 일찌감치 이세돌의 불계승으로 끝났을 것이라는 게 대다수 프로 기사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바둑이 끝난 후 사이버오로 타이젬 한게임 등 주요 인터넷 바둑사이트에는 "마치 마술을 보는 듯 했다", "코 끝이 찡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바둑을 보다가 난생 처음 눈물이 핑 돌았다" 등 에서 "이세돌의 흔들기가 정말 무시무시하다", "이세돌은 악마다", "아수라의 현신을 보는 듯하다"는 등 네티즌들의 관전 소감이 줄을 이었다. 정말 모처럼만에 감상한 싸움 바둑의 백미였다.
한편 박영훈은 대만의 1인자 저우쥔쉰에게 여유 있는 승리를 거뒀다. 집흑으로 별 다른 전투 없이 잔잔한 계가 바둑으로 이끌어 간 박영훈은 종반 끝내기에서 발군의 마무리 솜씨로 반면 10집 이상의 넉넉한 형세를 만들어 본선 1회전 경기 8판 가운데 가장 먼저 불계승을 거뒀다.
박영철 객원 기자 indra036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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