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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금융사정(司正)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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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금융사정(司正)의 추억

입력
2008.05.02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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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권에 ‘사정(司正)한파’가 불던 때가 있었다. 수많은 은행장들이 임기를 남긴 채 옷을 벗어야 했다. 꼭 15년전, 김영삼(YS) 정부가 막 출범했던 1993년의 얘기다.

김준협 서울신탁은행장, 이병선 보람은행장, 박기진 제일은행장, 이현기 상업은행회장 등 4명의 시중은행장들이 한달 사이 줄줄이 낙마했다. 모두들 ‘일신상 사유’로 얘기했지만, 실제 퇴진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들은 ‘이원조ㆍ금진호 라인’이란 공통점이 있었다. 천문학적 정치자금을 주물렀던 이원조씨, 노태우 전 대통령의 동서였던 금진호씨는 은행인사를 좌지우지했던 6공의 ‘금융황제’들이었다. 정부지분은 전혀 없는 민간법인 대표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중은행장은 권력 최고실세가 낙점하는 자리였고, 이ㆍ금씨는 은행장이 되기 위해 꼭 잡아야 할 생명줄이었다. 금융계 사정은 바로 이ㆍ금 인맥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뒤이어 김영빈 수출입은행장, 정춘택 은행연합회장 등 구정권과 가까웠던 인사들이 모조리 사퇴했다.

하지만 여론은 나쁘지 않았다. 독재정부의 특정 ‘줄’을 잡고 행장 자리에 올랐던 만큼, 이들의 낙마에 동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군의 ‘하나회’ 척결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사실 그 즈음엔 ‘문민’의 이름으로 ‘권위주의’ 잔재를 뿌리뽑는다는, 일종의 종교재판적 분위기가 있었다.

지금 금융공기업 수장에 대한 물갈이 작업이 한창이다. 많이 다르겠지만, 몇 가지 대목에선 15년전의 은행권 사정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우선 차이점. 첫째, YS정부는 시중ㆍ국책은행장을 가리지 않고 옷을 벗겼지만, 현 정부는 직접 임면권을 쥔 금융공기업 CEO만을 대상으로 한다. 둘째, YS정부에선 물밑에서 사정당국을 동원해 개인비리를 들춰내고 이를 통해 퇴진을 압박했지만, 지금은 공개적으로 전원사표를 받고 선별하는 방식이다.

반대로 유사점. 첫째, YS정부 시절만큼 무지막지하지는 않더라도, 또 정부관할의 공기업만을 손댄다 하더라도, 임기가 남은 CEO들까지 사표를 종용하는 것은 여전히 초법적이다. 둘째, 궁극적인 목적이 결국 과거정부 인사 물갈이에 있다는 점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정부는 지금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정권이 바뀌면 사람도 바뀌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공기업을 퇴직후 안식처 정도로 여겨온 관료들, 연봉은 수억원씩 받고도 개혁은커녕 직원정서와 야합해 ‘신이 내린 직장’의 담장을 더욱 높게 쌓고 있는 ‘모피아’들을 이번 만큼은 따끔하게 손봐줘야 한다고 사명감마저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지켜야 할 룰이 있다. 누구나 공감하는 룰 말이다. 아무리 옳은 명분이라도임기제를 이런 식으로 무너뜨리는 것은 결국 또 다른 관치에 불과하다. 과거정부 인사들을 갈아치우기 시작하면, 다음 정부도 그럴 것이고, 또 그 다음 정부도…. 이럴 바에야 차라리 공기업CEO 임기를 정권과 같은 5년 혹은 2년반으로 바꾸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YS정부의 금융계 사정은 결과적으로 실패작이었다. 구정권 실세인맥을 청소하는데는 성공했지만, 그 자리를 결국 신정권 실세라인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TK에서 PK로 바뀐 것 외에는 달라진 게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꼭 해야 한다면 과거 정권 임명인사, ‘모피아’ 인맥을 끌어내리는 것까지도 좋다. 하지만 후임은? 15년전처럼 또다른 특정인맥, 논공행상인사가 대신하지는 않을지 지켜볼 일이다.

이성철 경제부 차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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