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그것을 모르고 지나가거나, 머뭇거리다 놓치거나, 잘못 알거나, 알고도 ‘모르쇠’ 하면 필시 화나 욕을 당한다. 박미석 청와대 수석, 김정길 대한체육회장, 정연주 KBS 사장이 그렇다. 여기서 ‘때’란 물론 물러날 때를 말한다. 안타깝게도 세 사람은 상황은 다르지만, 결국은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기지 못했다.
박미석 수석은 내정과 동시에 논문 표절문제가 제기된 2월 중순에 물러났어야 옳았다. 촉박한 인선에 인사검증 시스템의 미비로 청와대가 몰랐고, 뒤늦게 알았지만 결격사유가 아니라고 옹호해 주었다 해도 말이다. 더구나 고위공직자의 인사검증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그 스스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농지 투기에 대한 거짓과 불법행위로 집착과 다욕(多慾)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중국고전 <회남자(淮南子)> 를 인용하면 ‘말에 일정한 진정성이 없고, 행위에 일정한 타당성이 없기에’ 그는 소인이 되고 말았다. 소인은 자신의 허물을 모르거나 숨기기에 급급할 뿐, 그것이 윗사람에게 누(累)가 된다는 사실을 모른다. 여전히 자신은 사랑 받고 있다고 착각한다. 급기야 임명권자가 “그게 아니다”라고 말할 때까지. 회남자(淮南子)>
물러날 때를 잘 알아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물러날 때를 아는 것도 예(禮)의 하나” 라고 했다. 그는 행동이나 마음에 거리낌이 있을 때말고도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두 가지 이유를 더 들었다. 윗사람이 무례하거나, 내 뜻이 행해지지 않을 때이다. 김정길 회장에게 딱 맞는 경우이다. 그는 장관이 만나주지 않는 것을 두고 무시 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유야 어디에 있건 문화체육관광부는 그가 함께 일하고자 했던 구안숙 사무총장 내정자의 승인을 거부했다.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을 노무현 정권의 코드인사로만 여기는 새 정부의 압박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니 울분을 삼키며 그만둘 수 밖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에게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모함으로 물러난 이순신을 다시 천거하려 애썼다. 그러나 조정의 반대로 뜻이 막히자, 벼슬에서 물러나려고 결심했다. 그러다 생각을 바꾸었다. 그 이유를 김탁환의 소설 <불멸의 이순신> 은 “지금은 때가 아니다.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고 왜적이 코 앞까지 밀려왔기 때문” 이라고 했다. 냉대와 질시를 참았기에 이순신은 다시 일어섰고, 조선은 승리했다. 불멸의>
김정길 회장 역시 대의를 위해 ‘조금만 더 참자’고, 그래서 ‘코 앞’(100일)에 닥친 스포츠 전쟁인 베이징 올림픽에서 멋진 승리를 거두고 나서 물러나자고 생각을 바꿀 수는 없었는지. 그래서 지금은 때가 일러 보이고, 그의 사퇴에서 “그래, 너희들끼리 한번 잘 해봐라”라는 억하심정만 느껴진다.
재신임을 묻는 건 당연
그나마 정연주 사장에게는 아예 그 ‘때’라는 것이 없어져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타의, 그것도 자기 식구들에 의해 맞이할 굴욕의 ‘때’뿐이다. 그는 그 때에도 여전히 정치적 탄압, 방송 독립의 훼손, 법의 무시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참여정부의 마지막 투사라고 외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말에 귀 기울일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의 버티기는 사욕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KBS 사랑도, 정의 수호도 아니다. 그 동안 무능과 편협으로 얼룩진 국민의 재산인 공영방송을 더욱 망가뜨릴 뿐이다.
최근 정부로부터 사표가 반려된 오지철 한국관광공사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코드인사인가 아닌가는 ‘만약 정권이 바뀌어도 전문성을 인정하고 나를 이 자리에서 일하게 할까’ 라는 질문으로 판단하면 된다. 그래서 재신임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이마저도 못하겠다고 버틴다면. 답은 분명하다. 그야말로 능력과 전문성을 무시한 오직 ‘코드인사’임을 자인하는 것이 된다.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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