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통권력에 휘둘리면 충무로도 '음반시장 꼴' 시간문제
평균 수익률 마이너스 43%, 1편당 평균 17억9,200만원 적자. 112편이 개봉하며 외견상 역대 최고의 호황을 누렸던 지난해 한국영화의 초라한 성적표다. 창작 능력 고갈과 불법다운로드 창궐 등이 원인으로 꼽히지만 결국 대기업 자본의 충무로 진출에 따른 부작용이라는 평가도 적지않다. 영화계가 KT와 SK텔레콤 등 막대한 자본력을 지닌 통신사의 충무로 진출을 마냥 달가워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호황→양질영화 생산’ 선순환 구조 깨져
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영화시장에서 극장매출이 차지하는 비율은 79.8%. 전년(71.7%)보다 8.1%나 증가했다. 지상파TV나 케이블TV, DVD 등 부가시장 규모가 급격히 축소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극장매출의 비중 확대는 사생결단식 마케팅으로 이어졌다. ‘극장에서 크게 터뜨려 크게 벌자’는 한탕주의가 영화계에 만연하게 된 것.
상업성 짙은 대작 영화들이 스크린을 독차지한 반면 작은 규모에 작품성 있는 영화가 설 자리를 잃게 됐다. 또 극장에서의 손실을 부가시장에서 메울 수 없는 구조가 고착되면서 창의성 넘치는 작은 영화 창작의 통로까지 막히게 됐다. 비디오 등 부가시장이 전체 영화시장의 73.2%를 차지하며 건전한 영화생태계가 형성된 미국과는 딴판인 셈이다.
이런 기형적인 시장이 형성되기까지 CJ엔터테인먼트와 쇼박스 등 대기업 계열의 투자배급사들이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케이블TV의 영화판권 가격은 편당 2,000만~3,000만원대. 1995년 케이블TV 개국초기 수준이다. 두 회사가 판권을 확보한 영화를 케이블TV 관계사인 CJ미디어와 온미디어에 독점적으로 공급하면서 판권료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
CJ엔터테인먼트와 쇼박스 등 대형 투자배급사의 수직계열화가 부가시장 붕괴에 일조를 한 셈이다. 영화계 한 관계자는 “대기업 계열 투자배급사가 영화 판권을 보유하면서 제작사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창구가 줄었다”며 “제작사도 극장에서 당장 먹힐 수 있도록 상업성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통신사 영화 진출 반갑지 않다.”
영화계를 콘텐츠 하청공장으로 전락시키는 대기업 자본의 부작용을 목격한 충무로 영화업계는 통신사의 행보를 잔뜩 경계하고 있다.
KT가 올해 영상 콘텐츠 확보를 위해 책정한 예산은 1,300억원. SK텔레콤은 계열사인 하나로텔레콤의 700억원을 포함, 1,000억원대의 자금을 영화 등에 쏟아 부을 태세다. SK텔레콤이 올해 판권확보 목표로 삼은 영화는 12편이나 된다.
SK텔레콤 관계자는 “판권 확보는 IPTV 방송과 인터넷 VOD 등 활용을 위한 것”이라며 “판권을 확보한 영화는 SK텔레콤 관계사에 독점적으로 공급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SK텔레콤이 투자한 영화가 경쟁입찰을 통해 정당한 판권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원천봉쇄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김현정 영화진흥위원회 연구원은 “현재 영화계는 부가시장이 정상화 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며 “통신사가 계열사 채널에 영화를 너무 싼 값에 제공하는 등 전횡을 벌이면 시장이 더 왜곡되고 양질의 영화제작을 막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음반시장 좌지우지하는 통신자본
이미 고사 상태인 대중음악시장은 음반제작사나 창작자 중심이 아닌 통신사가 잠식한 지 오래다. 통신사가 음원의 가격을 미리 정하면 그 수익을 통신사가 40%, 음반제작사와 작곡가, 가수 등이 60%를 나눠 갖는 형태로 시장이 재편돼 있다.
예를 들어 음반제작에 4억원 가량의 제작비가 들어갔을 경우 제작사는 1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려야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구조다. 조동춘 엠넷 음악사업팀장은 “매출 10억원을 내기에는 현실적으로 너무 힘들다”며 “제작사와 창작자가 힘이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러니 대중음악인들의 창작의욕은 날개가 꺾일 수 밖에 없다. 추연수 한국음악산업협회 국장은 “제작자들의 권리가 줄어들면 누가 음악을 만들려고 하겠느냐”며 반문했다.
양홍주 기자 라제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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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의 문화산업정책은…
‘규제’보다 ‘진흥’에 초점을 맞춘 문화산업정책은 이미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계속되어 왔다. 관련예산 규모도 1994년 87억원에서 올해엔 2,000억원을 웃도는 수준까지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콘텐츠 5대 강국이 되겠다는 현 정부의 캐치프레이즈는 아직 요원하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최근 한 토론회에서 “문화부와 산하기관의 콘텐츠 예산을 다 더해도 콘텐츠 5대 강국 목표를 달성하기엔 부족하다”고 자인했다.
대중문화계에서는 그러나 정부의 지원부족보다 효과적인 시장을 만들려는 정부의 의지 부족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추연수 한국음악산업협회 국장은 “지난 정부가 손쉽게 문화강국을 이루기 위해 통신자본의 시장진입을 용이하게 해줬고 소비자의 인기를 얻기 위해 온라인시장 강화로 음원 접근성을 높이는데 치중한 게 근본적인 문제”라며 현 정부에서도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추 국장은 이어 “디지털음원 소득을 분배하는 각 권리자들과 이동통신사, 정부의 협의 테이블 구성도 개선할 여지가 많다”고 덧붙였다. 심재명 MK픽처스 대표는 “영화산업으로 통신자본이 너무 많이 들어와 수직계열화가 심화됐다고 판단된다면 독과점 상황을 막아야 하며 때에 따라서는 공적 제재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와 관련산하기관들은 문화콘텐츠의 유통구조 왜곡을 바로 잡기 위해선 무엇보다 콘텐츠의 불법유통을 최소화하는 게 급선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김진규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산업진흥 본부장은 “불법DVD유통과 음원유출을 막기 위해 문화부 공무원에게 단속기능을 주고 디지털유통 상황을 점검할 수 있는 바코드와 같은 일종의 식별체계를 도입하기 위해 준비 중” 이라며 “초등학교 때부터 올바른 콘텐츠 사용을 위한 교육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양홍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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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작사에 불공정 거래 강요 말아야
거대 자본의 대중문화 산업 진출을 곱지않게 보는 시각이 많지만 선기능을 제대로 살리자는 주장도 적지 않다.
일단 거대자본의 진출은 주먹구구식 생산과 유통 구조에 머물던 대중문화산업의 진정한 산업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회계처리 방식의 투명성 확보 등 대중문화계가 한단계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
CJ와 오리온 등 대기업 자본이 충무로에 진출을 계기로 영화계의 숙원이던 ‘영화입장권 통합전산망’이 구축 된 것이 좋은 사례다. 한국영화가 10년 동안 유례없는 호황을 구가하며 산업화 단계에 접어들기까지 대기업 자본이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무시할 수 없다.
국내 제작사들이 통신사들의 대자본과 해외 네트워크를 발판 삼아 해외 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견도 많다. 고정민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대자본의 유입은 한류 시장 구축과 대중문화 산업 인프라 구축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영화계에서도 통신사 자본에 대해 긍정적으로 접근하자는 목소리가 있다. 이준동 나우필름 대표는 “영화산업 전체 입장에서 서로 공생할 수 있는 일정한 협의가 이뤄진다면 통신사의 충무로 진출을 크게 우려할 점은 없다”고 평가했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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