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1호 숭례문이 불타고 있을 때, 소신 있는 소방관이 지붕에 올라가 기왓장을 뜯고 살수(撒水)해서 불을 껐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사후에 해당 소방관이 기왓장 파손 등의 이유로 문책을 받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느 공무원이 국가적 위기 시 몸을 던지겠습니까?”
모 경제부처 고위관계자는 최근 감사원의 각 부처 주요 현안에 대한 과도한 정책감사에 따른 후유증에 대해 이같이 비유했다. 금융감독기구의 한 임원도 “장관과 실ㆍ국장들이 몇 달간 외부 전문가들에게 자문해 결정한 정책에 대해서 감사원이 보류 판정을 내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금융위기 차단 등을 위해 소신을 갖고 집행한 정책에 대해서도 검찰에 수사 의뢰하는 사례가 있어 공직사회를 위축시키고 있다는 게 관료들의 불만이다.
상당수 경제 관료들이 풀이 죽어 있는 것은 감사원이 참여정부 이후 본연의 임무인 회계 감사와 공무원들의 직무감찰 외에 구체적인 정책 및 행정 집행 등 정책감사에까지 칼을 들이대고 있기 때문이다. 각종 인ㆍ허가권과 공기업 민영화를 관장하는 경제관료들은 해당 기업인이나 금융인들에게 “감사원이나 검찰에 가서 먼저 승인을 받아오라”며 자조 섞인 푸념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공직사회 복지부동 부채질
이명박 대통령은 공공부문 혁신을 위해 공직자의 의식 개혁과 솔선수범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관료들과 공기업 임원들 상당수가 “손에 피를 묻혀 좋을 게 없다”며 감사 등에서 지적될 만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복지부동하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대우조선해양, 현대건설, 하이닉스반도체 등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기업들의 새 주인 찾아주기도 특혜 시비를 우려하는 관료들과 채권 금융기관들의 보신주의로 속도를 낼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의 민영화도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참여정부 이후 국가정책의 사령탑임을 자임해온 감사원은 부처별 정책시스템을 개선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정책감사를 강화했다. 국회의 감사 청구로 시작된 론스타 헐값 매각 특감을 비롯 신용카드 부실정책 특감, 한국은행의 외환운용 정책의 적절성 감사 등 전방위적인 정책 감사를 벌인 것이 대표적이다. 금융감독위원회, 금융감독원 등 금융감독기구에 대한 감사에서는 개편 방향까지 제시하겠다고 의욕을 보여 갈등을 빚었다.
피감기관들은 이 같은 감사원의 행보에 대해 “업무영역을 벗어나 월권을 하고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참여정부 말기에는 혁신기업도시 사업을 독려하는 감사를 벌였다가 새 정부 들어 이 사업의 경제적 효과가 부풀려졌다는 상반된 보고서를 만들어 직무유기성 코드감사 논란을 초래했다. 전윤철 감사원장이 참여정부 시절 “감사원이 정부의 정책실수를 요점, 정리해 차원 높고 세련되게 청와대의 싱크탱크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의욕과잉의 사례도 지적된다.
감사원은 정책 감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개별 사안에 대한 회계 감사보다는 불합리한 정책이나 정책결정 과정의 문제점을 파헤쳐 재발 방지를 위한 시스템 개선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논리다.
감사원의 역할 재정립 필요
그러나 감사원의 잦은 정책감사가 공직사회의 복지부동을 초래, 규제 완화와 공공부문 혁신을 더디게 한다면 감사원의 역할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감사원의 역할을 규정한 헌법 제97조처럼 감사원은 예산낭비를 막기 위한 국가기관의 회계 감사와 공무원의 직무 감찰은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설거지를 하다가 접시를 깼다고 나무라는 것처럼, 과도한 정책감사를 벌여 부처 장관 책임 하에 소신있게 정책을 집행한 것까지 문책하는 것은 적지 않은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새 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도 감사원이 그 동안 정책감사에 편중했다면서 대선 공약인 예산 10% 절감 등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정책감사는 미국 유럽처럼 행정부에 대한 국정 감사, 탄핵소추 등 강력한 권한을 가진 국회가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많다.
이의춘 논설위원 e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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