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했다. 그 만큼 세월이 흘렀으니 시들 법도 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직접 챙기는 그의 꼼꼼함 앞에선 세월도 비켜가는 듯 했다.
“올해로 벌써 45년이 됐네요. 회사 문을 연 게. 제약업계에 발을 들여 놓은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죠.” 고희(古稀)를 훌쩍 넘긴 나이였지만 최수부(73ㆍ사진) 광동제약 회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정력적이었다.
“자축할 일이 생겼어요. 비타500 판매량이 드디어 20억병을 넘었네요. 한 우물만 파다 보니 좋은 날도 있네요.”
비타500(100㎖)이 처음 탄생한 때는 2001년2월. 지금까지 국민 한 사람이 43병을 마신 꼴이다. 20억병을 눕혀 한 줄로 늘어 놓으면 지구를 6바퀴 돌고도 남는다.
비타500은 지난 2005년 한해만 5억병을 팔아, 난공불락처럼 보였던 박카스의 아성을 한때 무너뜨리기도 했다. 지금도 월 4,000만병 이상의 꾸준한 판매량을 보이고 있는 비타500은 이제 대표적 ‘국민음료’로 자리 잡았다.
최 회장의 경영철학은 뚝심과 신용으로 압축된다. 비타500의 신화도 이 때문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비타500 출시 당시 방부제 함유에 대한 논란이 있었어요. 나는 어떻게든 방부제를 사용하지 않은 제품을 내놓겠다고 고객들과 약속했고, 끝까지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최 회장은 드링크류에 방부제를 사용하지 않기 위해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였고, 결국 ‘무방부제 무카페인 비타500’을 만들어 냈다.
또 비타500은 마케팅의 승리이기도 했는데, 최 회장은 젊은 층을 겨냥해 온라인 마케팅에 집중했고, 약국망에 의존한 박카스와 달리, 슈퍼마켓 편의점 할인점 등으로 유통망을 다양화 시켰다.
“비타500이 성공을 거두자 여기저기서 유사 제품을 쏟아내기 시작했어요. 한 때는 비슷한 제품이 50개 이상 나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살아남은 제품은 비타500뿐 이지요. 이젠 소비자들이 유사제품을 먼저 알고 골라내고 있습니다.”
광동제약엔 비타500외에, 광동쌍화당과 우황청심환 등 대중적 ‘스테디 셀러’가 많다. 덕분에 회사인지도도 높은 편이다. 하지만 최 회장의 경영역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해방 전후 일본과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외로움과 이질감, 그리고 부친의 사업실패에 따른 가세위축으로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마칠 수 없었다. 12살 나이에 가사책임을 떠안고 생업에 뛰어든 그는 나무베기, 참외장사, 찐빵장사 등 돈 되는 일이라면 안해 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군 제대 후 ‘경옥고’(보약) 외판원으로 일을 하던 중 직접 제품을 만들어 팔기로 마음 먹고 드디어 1963년 서울 용산에 30평짜리 공장을 마련했다. 이것이 광동제약의 전신이다.
“사업을 시작했지만 이 역시 순탄치는 않았어요. 실무자 실수로 사업허가가 취소된 적도 있었고, IMF시절에는 부도직전까지 가기도 했지요. 제품 재료인 한약재 사향(麝香) 500㎏을 들고 은행으로 찾아가 사정한 끝에 겨우 부도를 모면했습니다. 평생 신용을 지켜왔고, 그 덕분에 주변 사람들과 은행에서 도와줘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올해 광동제약이 세운 매출 목표는 3,000억원. 회사도 클 만큼 커졌다. 하지만 그의 계획엔 아직 ‘은퇴’란 없는 듯 싶었다.
“경영자가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와 건강을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죠. 하지만 신용을 잃으면 전부를 잃게 됩니다. 아직 고객들과 한 약속들이 많습니다. 약속을 지켜야죠.”
허재경 기자 ric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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