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이 22일 발표한 경영쇄신안의 핵심은 ‘투명경영 강화’로 요약된다. 삼성그룹 글로벌 경영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온 전략기획실이 해체됨에 따라 사실상 구조조정본부(구조본) 시대를 마감하고 계열사별 전문경영인 시대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삼성카드가 보유한 에버랜드 주식이 매각되면 오너 일가의 기업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순환출자 구조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 같은 삼성그룹의 변화는 당장 재계에 엄청난 파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경제단체들이 이번 쇄신안에 대해 “삼성이 국민들의 더 큰 신뢰를 얻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것은 바로 다른 재벌 기업의 오너십과 경영체제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 아듀, 구조본 시대
6월 말로 예정된 삼성그룹의 전략기획실 해체는 기존 그룹경영 체제의 대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한화그룹이 2006년 말 경영기획실 체제를 도입하면서 형식상 재계의 구조본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사실상 여러 그룹이 삼성의 전략기획실과 같이 구조본 역할을 하는 조직을 통해 계열사 전략을 조율해 왔다. 따라서 시민단체에선 그 동안 구조본이 겉옷만 갈아입었다고 비판해왔다.
그런 만큼 재계 1위인 삼성그룹의 전략기획실 해체는 유사한 경영 시스템을 갖고 있는 다른 그룹에도 영향을 미쳐 실질적인 구조본 시대의 종말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 일단 재계에선 삼성그룹의 전략기획실 해체를 계기로 지주회사 전환 등 지배구조 개선 분위기가 확산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미 LG그룹은 2003년 구조본을 해체하고 지주회사로 전환했으며, SK그룹도 같은 해 분식회계로 곤욕을 치른 뒤 구조본을 해체하고 지난해 지주회사 체제를 갖췄다. 현대ㆍ기아자동차그룹은 거꾸로 구조본이 없었으나 최근 그룹의 경영전략을 책임지는 기획조정실을 설치했다.
아직 구조본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그룹들은 삼성 쇄신안의 파장을 예의 주시하며 잔뜩 몸을 사리는 분위기다. A그룹 관계자는 “전문경영인 체제로 바뀌더라도 그룹의 총괄조정기구는 필요하다”며 “계열사 간 중복투자 방지 등은 구조본의 순기능”이라고 강조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승철 전무는 “오늘날의 삼성은 강력한 오너십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 회장이 사퇴할 경우 대규모 투자가 핵심인 IT산업의 특성상 누가 투자 시기와 방법을 결정할지 상당히 걱정된다”며 “오너의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가 다른 대기업으로 확대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 전문경영인 시대 도래
이건희 회장의 퇴진은 오너 일가가 지배하는 LG그룹, SK그룹, 현대ㆍ기아차그룹, 롯데그룹 등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특히 LG그룹, SK그룹 등 지주회사 전환을 통해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꾀한 기업들도 아직까지 오너 일가의 경영체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회장 퇴진이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특히 2, 3세 승계 구도를 눈 앞에 두고 있는 기업들은 더욱 부담스럽다. 3세 경영승계 과정을 밟고 있는 대림과 풍림산업, 박지원 두산중공업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지난해 말 4세입성을 가시화한 두산그룹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업계 관계자는 “예전처럼 재벌 2, 3세의 승계 구도가 별 문제없이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오너의 퇴진은 자연스럽게 전문경영인의 부상으로 이어진다. 과거 삼성그룹이 이 회장과 전략기획실의 방침에 따라 움직였다면, 이제는 각 계열사의 최고경영자(CEO)들이 기업의 향배를 좌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계열사 CEO들의 경영능력이 예전과 다른 무게를 갖게 됐다.
최연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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