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마흔에 강단을 떠나면서 제일 크게 바뀐 것 하나가 글쓰기의 길이다. 그때까지는 학자(및 그 지망생)만을 상대로 글을 썼는데, 이제 더 넓은 범위의 독자를 상대하게 된 것이다. 꽤 쉽게 적응한 편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학술논문을 쓸 때도 소설을 쓴 거냐, 논문을 쓴 거냐, 야유를 곧잘 들었으니까.
그런데 그 후 십여 년 동안에도 출판사의 요구기준이 계속 변해 적응을 어렵게 만든다. “쉽고 재미있게” 써달라는 요구에 한정이 없는 것이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고 한다. 맛있는 음식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고 충실한 음식은 힘을 준다. 글에도 맛있는 글과 충실한 글이 있다.
음식 중에는 영양과 관계없이 즐거움만을 위해 섭취하는 것이 있다. 술과 차를 필두로 하는 기호식품이다. 마음의 영양은 몸의 영양보다 추상적이고 범위가 넓다. 재미만을 생각하고 고른 책에서 뜻밖의 소득을, 때로는 스스로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얻는 것이 글 읽는 사람 모두의 경험이다. 마음의 양식에서는 기호식품의 경계가 그리 뚜렷하지 않은 것이다.
마음을 위한 기호식품의 자격이 “쉽고 재미있는” 것일까? 재미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쉽다는 말에 문제가 있다. 읽는 데 전문지식 등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 없다는 뜻이면 좋다. 하지만 실제로는 집중과 긴장이 필요 없다는 뜻으로 통상 쓰이는 말 같다. 글 읽기의 만족을 위해서는 긴장감이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아야 한다. 긴장감을 극한으로 줄여주려는 출판계의 근년 풍조는 독자의 진정한 수요에서도 벗어나는 것이다.
패스트푸드 중에 몸에 해로운 정크푸드가 많은 것은 피상적 수요에 휩쓸리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제 수요를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표출하는 것이 피상적 수요다. 쉽게 목구멍을 넘겨 얼른 배를 채우기 위해 패스트푸드에 손을 뻗친다. 음식 장사 중에 패스트푸드 장사가 있는 것처럼, 출판계에도 패스트푸드 출판업자가 있는 것을 탓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문화사업을 자임하는 출판인들은 극한적인 “쉽고 재미있게” 풍조를 돌아봐 주기 바란다.
김기협ㆍ<밖에서 본 한국사> 저자 밖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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