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당장 급박한 과제는 친박연대와 무소속 연대의 한나라당 복귀 문제다. 제대로 갑옷과 무기도 갖춰주지 못한 채 “살아서 돌아오라”는 비장한 특명만으로 싸움터로 떠나 보낸 장졸들임을 생각하면 당장 맞아들여 마땅하다. 그러나 당내 주류의 ‘복당 불가’ 자세에 별 동요가 없어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하다.
게다가 친박연대가 비례대표 공천 의혹에 휘말림으로써 복당 당위론의 논리기초에 구멍이 뚫렸다. 양정례 당선자 관련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두고 친박연대는 ‘정치탄압’, ‘박근혜 죽이기’라고 반발하고 있지만 여론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지난해 대선 당시 ‘BBK 의혹’ 수사에서 확인됐듯, 검찰수사를 보는 국민의 눈이 많이 바뀌어 ‘정치탄압’이라는 규정 자체가 오히려 구태의연해 보이기 십상이다. ‘박근혜 죽이기’ 주장도 쉽사리 통하기 어렵다. 양 당선자를 비례대표 1번으로 공천한 이유가 산뜻하게 설명되지 못한 만큼 의심의 눈초리는 검찰보다는 친박연대 쪽으로 쏠려 있다.
■ 자신감 갖고 멀리 봐야
검찰 수사 결과에 따라서는 애초에 친박연대가 총선에서 주된 존재근거로 내세웠고, 박 전 대표도 전례 없이 강한 어조로 밝힌,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는 말의 무게가 뚝 떨어질 가능성마저 있다. 이는 거짓말과 친한 정치인이라면 몰라도 명분을 최대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온 박 전 대표에게는 치명타가 된다.
그렇다고 친박연대와 무소속연대를 외면하는 것은 자신의 ‘장졸’에 대한 의리가 아닌 동시에 박 전 대표 특유의 인간적 친근감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어느 쪽도 쉽지 않으니 숙고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위상으로 보아 지나친 장고는 곤란하다. 어려운 문제가 터질 때마다 칩거와 장고를 거듭하는 것은 정치지도자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결단력에 대한 의문을 낳는다. 지난해 대선후보 경선 이후 그의 칩거는 경선 직후, ‘속았다’ 발언 직전 등 긴 것만으로 벌써 세 번째다.
그가 가진 정치적 자산에 비하면 능동적 상황타개를 피하는 모습으로 비치기 쉽다. 그는 강력한 지지기반을 가졌다. 이른바 TK지역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정치적 영향력은 PK지역과 충청, 강원, 수도권에까지 미치고 있다. 정치적 호감과 조직력, 탄탄한 지역기반을 동시에 가진 정치인은 사실상 YS, DJ 이래 그가 유일하다.
그것이 ‘박정희의 딸’로서 가진 ‘상속지분’ 때문만도 아니다. 정계진출 이후에 본격적으로 축적된 영향력은 대부분 스스로의 힘으로 쌓아 올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언력(言力)’, 즉 말의 힘이다. 억지로 힘주지 않고, 높지도 않지만 그의 말은 메시지가 분명하다. 장황하지도 않고, 꾸밈도 없다. 많은 정치인들이 유세 때면 목이 쉬는 것과 달리 늘 고른 목소리를 유지한다.
최근에 만난 중진ㆍ원로 정치학자들은 한결같이 그의 언력에 혀를 내둘렀다. 특강을 맡기면 정확하게 주제를 포착하고, 정확하게 시간을 맞춘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혹독한 고초를 당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조차 어느새 ‘박정희의 딸’이라는 선입견이 사라졌다고 토로했다. 대중과의 접촉에서 발휘되는 ‘현장 흡인력’이 이만한 정치인은 달리 찾아볼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 실리보다 명분 쌓을 때
박 전 대표는 자신의 정치자산을 재평가, 자신감을 키울 만하다. 가령 당내 주류인 ‘친이 세력’은 당 안팎에 포진한 ‘친박 세력’에 비하면 추상적이고 일시적인 결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자신감이야말로 빠르고 정확한 판단의 바탕이 된다.
그는 일단 친박연대와 무소속연대 쪽에 ‘행동통일’을 당부했다. 뛰쳐나갈지, 양다리를 걸칠지, 선택이 임박했다는 신호다. 다만 자신의 강점을 올바로 인식한다면 눈앞의 실리에 매달려 당권 경쟁이나 ‘친이계’와의 신경전에 골몰할 필요는 없다. 오직 그만이 정치를 길고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명분을 최대한 살려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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