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주한 미 대사에 부임할 캐슬린 스티븐스만큼 한국과의 인연이 깊은 외교관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는 1975년부터 2년 동안 평화봉사단원으로 충남 부여에서 평화봉사단원으로 영어를 가르쳤다. 한국 친구들과 제자들은 첫 수업 때 ‘심은경’이란 이름을 칠판에 쓰던 그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몇 년 뒤 외교관이 된 그는 1984년부터 3년 동안 주한 미 대사관의 정무팀장 등으로 일하면서 한국사의 격랑을 함께 넘었다. 9일 상원 인준 청문회에 선 스티븐스 대사 지명자는 “한국이 70~80년대를 격동기를 지나 민주주의 국가로 우뚝 선 모습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의 개인사는 한국과의 인연에 각별함을 더해준다. 외아들 제임스는 그의 한국 근무 시절 태어난 ‘메이드 인 코리아’다. 스티븐스는 청문회장에서 한국인 전 남편과의 사이에 태어난 제임스를 소개하면서 “내 아들은 일찌감치 두 나라의 다리가 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쯤이면 한국인에게 마음으로 다가서려는 애정이 읽히고도 남는다.
부임할 나라와의 인연을 강조하고 그 국민에게 관심을 쏟는 것은 외교관의 중요한 덕목이다. 외교에서는 공식 업무나 의전보다 사적 인연과 관심이 양국 관계의 복잡한 일들을 풀게 하는 데 힘이 될 때가 많다. 반미 정서가 강하게 일었던 때 부임한 크리스토퍼 힐 전 대사(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한국인들에게 먼저 다가옴으로써 인기 있는 대사로서의 평판을 쌓았다.
그렇기에 한국말을 잘하고 김치까지 담글 수 있다는 애한파(愛韓派) 스티븐스가 주한 대사로 부임하는 데 대한 기대가 높은 것은 자연스럽다. 한국에 새 정부가 출범, 한미 동맹의 틀을 새롭게 짜는 일이 외교적 과제로 떠오르는 시점에서 한국을 잘 아는 스티븐스 지명자의 개인적 이력은 양국 모두에게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환상은 금물이다.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자국의 이익에 충실해야 할 외교관의 본분을 잊게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티븐스 지명자도 인준청문회에서 이미 국익에 충실한 외교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프간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한국이 어떤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는지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발언은 한국 정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재파병에 대한 은근한 압박으로 읽힌다. “나는 안전하고 맛있는 미국산 쇠고기가 한국 시장에 제한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모든 방법을 강구하겠다”는 발언에서는 고압적 분위기까지 느껴진다.
지금 미국 정부는 한미 동맹 관계의 복원을 앞세우는 한국 정부에게 안보와 경제에 대한 무차별 공세를 쏟아내고 있다. 미사일 방어(MD)계획 참여,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참가, 주한 미군 방위비 분담액 인상 등 동맹 강화를 고리로 한국의 성의 있는 선물을 요구하고 있다. 그 요구의 한 축을 스티븐스 대사 지명자가 맡을 수밖에 없다.
스티븐스 대사 지명에 영향력을 끼쳤다는 힐 차관보는 주한 미 대사 부임을 앞에 둔 2004년 7월 미 국무부에서 한국 특파원들과 간담회를 하면서 “탱고를 추려면 두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두 나라의 관계 발전을 위해 양쪽 모두 호흡과 스텝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는 강조였다. 스티븐스 대사가 출 탱고는 어떤 모습일까. 그가 조지 W 부시 정부 마지막 대사로서의 소임을 멋진 춤사위로 끝내기를 바라지만 일방적으로 미국의 요구 보따리만 풀어 놓는다면 두 나라의 스텝은 엉키고 말 게 뻔하다.
김승일 국제부장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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