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을 고르는 행위는 어떤 연출가에게 있어서는 정치적 행위가 된다. 2006년 박장렬에 의해 <그놈은 없고 그녀는 갔다> 라는 제목으로 초연됐던 볼프강 바우어 작 <찬란한 오후> 를 <관객모독> 으로 잘 알려진 극단 76단 소속 연출가인 기국서가 다시 선택했다. 관객모독> 찬란한> 그놈은>
‘(의미를) 묻지 마!’ 방식의 삶, 시간 죽이기만 남은 젊은 세대의 존재방식이 하나의 정치적 행위일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는 작품이다.
병든 사회를 되비추는 무대는 이 병듦을 넘어설 수 있겠는가. 연극은 과연 극장 밖 삶에 아직도, 무엇을 요청할 수 있겠는가. 무대와 객석 간의 발신과 수신 과정에 대한 연출가의 욕망과 의지를 이해하지 않으면 <화려한 오후> 는 배우들의 위악적 포즈와 과다노출한 몸, 섹스와 폭력을 전시하는 관음증 유발형의 뒷골목 연극으로 오해되고 만다. 화려한>
체 게바라 얼굴이 정중앙에 붙은 변두리 시나리오 창작 공간, 작업실에서 네 명의 젊은이들이 소일한다. 그들은 “우리 저녁에 뭐할까?”를 반복적으로 되뇌면서 “나가자”를 말하지만 그들 누구도 좀체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무언가 변화를 기다리지만 대마초와 분방한 섹스 속에서 자극을 구할 뿐이다.
자산 없는 청춘이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 속에서 펼쳐 놓을 수 있는 것은 한 줌 재능의 좌판일 뿐, 그러나 그 상품은 대중문화 소비구조 속 상호모방과 인용, 표절로 점철되어 있다.
예술가로서 가짜 자의식조차 없는 이 젊은이들이 속한 완벽한 ‘무의미 월드’ 앞에서 ‘퇴폐’에도 이유가 있었던 세대에 속하는 연출가는 힘이 부친 듯 보인다.
아니면 젊은 세대의 문화소비 공간에 접근불능을 선고받은 기성세대의 한계 때문인가, 20대의 일상과 공간의 재구성을 젊은 배우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오늘날 정치현실에 대한 냉소적 풍자와 기성문화에 대한 조롱 대목에서나 슬며시 왕년의 장기를 한 자락 얹는다.
한국 언더그라운드 연극의 드문 계보 속에서 극단 골목길은 ‘영원한 청년정신’ 기국서를 불러내는 데는 성공하지만 그만의 텍스트로 쓰도록 종용하는 데는 실패하거나 타협했다.
더 이상의 불온의 대상도, 혁명의 꿈도 없으며 ‘회피’와 ‘퇴행’의 액션만이 가능한 오늘날 젊은이들의 출구 없는 현실 앞에서 쓸쓸히 돌아설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대중성과 흥행 규칙뿐인 연극들의 전방위적 포진 속에서 대항할 담론과 미학을 잃고, 정체성 연명 위기를 겪고 있는 소극장 현실과 정확히 부합한다.
정면으로 쏟아지는 불온과 저항의 목소리가 그립다. 2008 극단 골목길 릴레이 공연 첫 작품. 정민영 역, 노승탁 번안. 공연은 27일까지 스튜디오 76.
극작ㆍ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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