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으로 책을 들고 왼손 엄지로 페이지를 넘기면서 오른손으로는 세수를 할 때, 나는 참 비효율적인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고양이 세수마냥 얼굴 이쪽저쪽을 애써 닦아내면서 넘기는 페이지가 많아봐야 몇장이나 되겠는가. 차라리 책을 놓고 재빨리 세수를 한 다음 느긋하게 앉아서 책을 읽는 게 훨씬 현명한 길일 텐데, 당장 손에서 책을 놓으려면 꽤나 용기가 필요하다. 눈에 물 들어가는 것도 감수해내면서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항상 책이 재미있는 것도 아닌데.
아는 사람들은 안다, 활자 중독증이 얼마나 벗어나기 어려운 병인지. ‘문장’이 아닌, ‘활자’라고 굳이 표현하는 이유는 눈을 붙잡는 것이 언제나 문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유려한 문체와 숨가쁜 전개로 독자를 사로잡는 멋진 작품들도 있지만, 이렇게 세수 중에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글줄들은 어제 받아온 등록금 고지서일 경우도 있다. 무언가 읽을거리가 없으면 심심하고 불안해서 괜히 애꿎은 호텔 룸서비스 메뉴만 들볶아댔던 기억도, 활자중독자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드문 경험이 아니다.
알코올이나 니코틴에 인이 박인 사람들은 주변에서 뜯어 말리기라도 하지, 아무도 모를 혼자만의 이 즐거운 중독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기만 한다. 뭐 이렇게 전개가 지루하냐며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는 그 수많은 책들. 덕분에 우리 집 거실에는, 침대 곁에는, 컴퓨터 책상과 화장실에는 이런저런 책들이 어지럽게 흩어져서 오늘도 나를 유혹한다. 자, 어떤 놈부터 골라잡을까. 일단 손이 간 뒤에는 되돌릴 수 없으니 신중해야 한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 손을 놓을 듯도 한데, 그 쉬운 결정을 내리지 못해 오늘도 활자에, 문장에 질질 끌려가는 것이 중독자들의 서글픈 속성이니.
가장 큰 딜레마.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밥 먹을 때 책 읽는다고 야단치는 사람은 없어졌는데, 멀티를 하다 보면 종종 책장에 김치국물이니 치약이 튄다. 이렇게 우글우글해지는 페이지들을, 안쓰러워 어떻게 하나.
호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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