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전 이맘때다. 꽃내음가득하고신록이눈부시던그날, 1986년4월28일오전 신림사거리. 두명의 서울대생이 3층 건물옥상에서 전신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댕겼다. 당시 21살의김 세진군과 22살의 이재호군은 서울대생의 전방입 소반대 시위를 주도하던 중 이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이들은 각각 5일과 28일 후 숨을 거뒀다. 이들은 죽는 순간에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 을남겼다.
안타까운 죽음이 생각난 건 지난달 개봉한 다큐멘터리 <과거는 낯선 나라다> 를 보면서였다. 두 학생의 분신을 다룬 다큐멘터리는 90분 내내 친구와 후배들의 인터뷰를 통해 망각과 기억의 중간쯤을 헤집는다. 그들의 진술을 들으면 서까맣게 잊고 있던 과거가 스멀스멀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 저런때가 있었지”하는 충격과 함께. 그랬다. 불과 20년 전 한 줄기 희망도 찾아볼 길 없는 암울한 세상이 있었다. 과거는>
그 당시 많은 학생들은 민주화를 소명으로 인식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내던졌다. 우리 사회가 이만큼 민주화의 길을 걷게된것이 그들의 순수한 열정과 용기 때문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세상은 바뀌었다. 다큐멘터리 속 대사처럼 “목숨걸고 주장했던 전시작전권 반환을 미국이 선 뜻받아 들인 작금의 현실”은 혼란스럽다“. 촬영하면서 내내 느낀 것은 이런게 무슨 의미가있느냐 였다”는 한 젊은 제작진의 푸념은 비수처럼 날카롭다.
얼마 전 대학생 7,000여 명이 꽤 오랜만에도 심에 모여 시위를 벌인 목적이 등록금 인상 반대였던 것을 알고 새삼 세상이 달라진 것을 실감했다. 경찰은 학생보다 두배나 많은 병력을 동원하는 등 잔뜩 긴장 했지만 그럴 필요조차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그래서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지만 그냥 그랬겠거니 하고 넘기기에는 왠지 가슴이 답답하다.한총련이 출범 16년만에 처음으로 신임 의장 선출에 실패한 것을 두고 학생 운동이 드디어 몰락했다고 반겨야 할 일일까. 정치 무관심이 갈수록 커져 이번 총선에서 부재자 투표소 설치를 요청한 대학은 세 곳뿐이라고 한다.
대학가에 인문-사회과학 분야는 자꾸 위축되고, 국립 서울대에 마르크스 강의가 없어져도 이렇다 할 반응이 없다. 대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동아리가‘부자 동아리’고, 재테크 관련 특강이나 강연회마다 문전성시며, 게시판에는 취업과 토플 관련 벽보만 나부낀다. 이런 것들을 보고 대학생들이 이념에서 벗어나 실용적으로 돼 간다고, 대학이 제자리를 찾아간다고 고개를 끄떡여야 할 것인가.
안정된 직장을 얻어 잘 사는 것이 대학생들의 지상목표가 되는 사회가 건강 할 수는 없다. 대학교육의 타락이라고 불러야할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의 풍토와 맞물려 있다. 이성이 마비되고 물신(物神)만이 지배하는 사회 전반적인 흐름의 투영인 것이다. 대학의 위기는 사회의 위기다. 약자에 대한 배려와 인간과세계에 대한 고민, 사회에 대한 치열한 관심이 없는 젊은이들에게 사회발전을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세진, 이재호군은 그날의 행동에 앞서 각각 부모에게 글을 남겼다“. …대학에 들어와 우리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밤을 새웠습니다….”“…부모님에 대한 진정한 효도는 올바르게 사회에 봉사하는 의연한 삶을 개척하는 것 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그들을 잊고 있다
이충재 부국장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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