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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14) '병역미필'에 발목… 홍콩행 부푼 꿈 물거품 위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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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14) '병역미필'에 발목… 홍콩행 부푼 꿈 물거품 위기에

입력
2008.04.0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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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당시 TV잡지로는 <주간tv> 가 유일했다. 방송이 몇 회 나가지도 않았는데 연예인 인기 순위(남녀 가수, 코미디언, 영화배우, 탤런트) 5위로 뛰어올랐다. 방송국은 서둘러 나의 다음 작품을 준비했고, 영화사는 영화사대로 시나리오를 계속 ‘디리밀었다’. <쇼 브라더즈> 껀은 해프닝으로 생각하고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반도호텔 <용궁> 왕사장이 방송국으로 계약서를 들고 찾아왔다. 런런쇼 회장이 나를 홍콩에서 세계적인 배우로 키워 보겠다며 10년 전속 계약서를 보낸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좋았지만 즉답을 할 수가 없었다. 10년? 그렇게 긴 시간을 미지의 세계에 던진다는 것이 갑자기 두려워졌다. 나는 고민했다. 과연 내가 배우로서 가능성이 있는가? 더구나 세계적 경쟁력이 있겠는가? 얼떨결에 배우가 되었고 기적 같은 일로 배역을 땄을 뿐인데...

마침 이형표 감독(<서울의 지붕밑> , <머무르고 싶은 순간들> )이 출연 교섭차 만나자고 하여 그에게 <쇼 브라더즈> 에 대해 물었다. 이 감독은 일찍부터 USIS(미공보관)에서 일을 하여 세계 영화계를 잘 알고 계셨다.

그는 계약서를 읽어보고는 “이런 행운이 어디 있냐. 빨리 가라. 그 곳에 가면 네 인생이 바뀐다”며 격려하여 주었다. 홍콩에서 또 독촉이 왔다. 쇼 회장이 빨리 계약서에 서명하고 출국하라는 것이었다.

그래, 가자. 세계로 나가자. 나는 생각을 굳혔다. 단지 계약기간만은 조정해야 했다. 5년으로 단축하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나에게 많은 투자를 계획하고 있기에 10년 전속은 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내 태도가 완강하자 결국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는 방송국에 홍콩과 계약한 사실을 알렸다. 고 PD와 스태프, 연기자들이 매우 섭섭해 하였다. 특히 차기작에 함께 공연하기로 예정된 조영일 선배가 못내 아쉬워하였다.

내성적인 김혜자 선배는 웃으며 잘 결정했다고 격려하여 주었다. <연화궁> 의 김영곤 작가, 고성원 PD, 스태프들과 연기자들의 지극한 사랑이 없었다면 세계무대 진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월이 40여년이 지났지만 그 분들께 이 글을 통해 진심으로 고마움의 인사를 드린다. 고국을 떠난다고 결심을 하자 언제 다시 돌아오게 될지 모르는 내 나라 내 땅을 두루 밟아 보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생겼다.

무작정 배낭을 메고 나섰다. 탤런트가 되기 전에 입었던 꾀죄죄한 ‘잠바때기’ 차림으로 나는 완행열차에, 혹은 털털거리는 시외버스에 내 몸뚱이를 던지고 구름처럼 가버리는 먼지를 돌아보며 전국 8도를 유랑하였다.

나는 그 때 어렸을 적 아무것도 모르고 덤벼든 4.19 그리고 6.3 데모 때의 ‘내 나라’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어디를 가나 내 집 같고 누구를 만나도 이웃 같았다. 가난하지만 인심 좋고 순결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 그 산천은 찬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는 땅을 밟으며 바로 여기가 내가 평생을 바쳐야 할 곳이라고 되새겼다. 이제 겨우 내 나이 스물. ‘대한민국의 건아’로서 세계에 나가 이 나라를 자랑스럽게 하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했다.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나라 ’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홍콩에서 초청장이 도착해 있었다. 여권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혀 생각하지 못한 장애가 생겼다.

<병역미필> . 나는 군대 가기 전이었다. 누구도 병역을 필하지 않으면 출국할 수 없었다. 세계영화계로 진출하겠다는 꿈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았다. 홍콩에서도 비상이 걸렸다. 왕사장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찾았다. 무슨 수든 써야 했다.

당시 병무 행정 주무부서는 국방부 병무국이었다. 마침 셋째 헌종형이 병무국장을 안다는 사람을 찾아냈다. 나는 신바람이 나서 소개장을 들고 병무국장실로 달려갔다.

그러나 부관이 소개장을 갖고 국장실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바쁘셔서 만날 수 없다며 나를 따돌렸다.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나는 결심했다. 누가 이기나 보자!

국방부 병무국(현재 서울 병무청 건물)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너무도 길고 높았다. 그러나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전 8시에 병무국장 비서실로 출근하여 오후 6시에 퇴근하였다.

그러기를 한 달. 이 과정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여권에 필요한 호적초본을 떼러 서대문 구청에 갔을 때다. 발급 신청을 하고 밖에서 기다리는데 건너편 건물에 붉게 써놓은 ‘운명’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 왔다. 운명? 이를테면 ‘점보는 집’이었다. ‘ 그럼 내 운명은?’

나는 길을 건넜다. 어두운 건물로 들어서 으스스하고 좁은 계단을 올라갔다. 내 ‘운명’을 난생 처음 살짝이나마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계단 끝 낡은 방문을 노크하자 50대 남자가 맞아주었다.

그는 내 사주를 한참 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한 마디 뱉었다. “내가 당신 사주를 보졀?지금까지 여기 있었군.” 나는 눈을 껌벅이다가 물었다. “외국에 나가야 하는데 가능한가요?” 그가 빙그레 웃었다. “물론이지. 당신 가고 싶은 데로 어디든, 얼마든지...” 나는 기분이 좋아서 급히 복채를 내 놓았다.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복채를 돌려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공하고 나서 오늘 내가 한 이야기나 기억해 주시오. 자. 나는 할 일을 다 하였으니 이제 이 점집을 닫아야겠소.”

우연인지 모르지만 훗날 그 길을 가다보니 그 ‘운명’의 간판은 사라지고 없었다. 마침내 병무국장이 나를 들어오라고 했다. 그는 비서실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 인사하는 나를 한 달 내내 봤지만 한 번도 눈길을 준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나를 부른 것이다.

나는 정중히 방문을 노크하고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이름은 최훈섭. 박정희 대통령과 육사2기 동기, 현역 육군 소장. 땅땅한 체구의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 그와의 맞대면이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다. 과연 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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