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단의 대표 중견 문인수(63), 김혜순(53) 시인이 나란히 시집을 냈다.
일곱 번째 시집 <배꼽> (창비 발행)에 문씨는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 사람의 냄새가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며 “시를 쓴다는 것은 결국 사람 구경일 것이다”라고 적었다. 그 발문대로 새 시집의 많은 시편이 초상(肖像)이다. 심히 굽은 등으로 동사무소 오르막길을 걷는 독거노인(‘꼭지’), 넓은 벽에 시멘트 반죽을 바르는 사내(‘벽화’), 추운날 길가에 주저앉아 대파를 다듬는 노점 아주머니(‘파냄새’), 귀농할 채비 중인 시인의 단골 이발사(‘아마존’)…. 배꼽>
사람을 구경하는 시인의 시선은 질기다. 값싼 연민에 빠지지 않고 “꿈틀대는 삶의 현장”(황동규 시인의 표사)에 밀착한다. 한 할머니, 만금 개펄에서 캐온 조갯짐 망태를 벗으며 내뱉은 “죽는 거시 났겄어야, 참말로”란 탄식에 시인은 이렇게 화답한다. ‘참말로/ 늙은 연명이 뱉은 절창이구나, 질펀하게 번지는 만금이다.’(‘만금이 절창이다’) 어시장 시멘트 바닥, ‘시꺼먼 고무치마 두르고 도심 인파 속을 오체투지 기어다니던 사내’는 보이지 않고 대신 커다란 문어가 기어다닌다. ‘해저의 저 느린 춤, 놈의 가눌 길 없는 머리통은 이제 말할 수 없이 무거운 짐이다. 사내가 끌던 깜깜하고도 질긴 하반신, 뚜벅뚜벅 걸어간 곳은 어디일까.’(‘막춤’)
문씨는 한 산문에서 “내 시가 자칫 해탈하지 말았으면 한다. 결론내리지 말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적었다. 늘 길 위에서 감각의 날을 벼리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는, 도저한 통찰과 감각을 곧추세우는 시어로 무장한 이번 시집에도 오롯이 묻어난다. “갱년기를 모르는 시인”이란 문단의 평은 계속될 듯싶다.
올해 시인 등단 30년째를 맞는 김씨의 아홉 번째 시집 <당신의 첫> (문학과지성사 발행)은 “자기 소멸에 대한 지극한 열망으로 시에서 어떤 것으로도 고정되거나 축적되기를 거부”(평론가 심진경씨)한다는 평가를 거듭 확인시킨다. 당신의>
김씨는 자서에 “이번 시집에선 랩 음악이거나 음정 음악이거나 낮은 톤의 플로우 창법으로 부르면 어떨까 생각했다”고 적었다. 플로우(flow)는 랩 음악 용어로 비트(박자) 위에 가사를 얹어 부르는 방식. 랩을 하듯 시를 쓰겠다는 의도는 ‘첫’ ‘전세계의 쓰레기여 단결하라’ ‘쌍비읍 징그러워’ ‘핑크박스’ 등에서 특히 도드라진다. 랩하듯, 시인이 심어놓은 라임(ryhmeㆍ운)을 살리면서, 낮은 톤(toneㆍ음정)으로 읽으면 흥겹다.
여러 시편에 담긴 상상력이 그로테스크하다. 시인은 ‘저 여자 두 다리는 마치 가위 같’다며 출산의 과정을 ‘두 다리 사이에서/ 빨간 머리 하나가 오려지고 있을 때’라고 표현(‘붉은 가위 여자’)하고, ‘고해성사실 창구멍은 벌집처럼 생겼어’라고 시작하는 ‘웅웅’에선 온갖 권위적 존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처치곤란한 ‘벌떼’들로 비유한다. ‘불가살’ ‘lady phantom’ 같은 시편에선 분열된 자아를 상정하고 자기 갱신의 소망을 피력한다.
이 선연하고 독창적인 미학은 남성 중심적 언어 체계를 벗고 새로운 시적 언술을 모색하는 김씨의 오랜 여정에서 비롯한다. ‘그럼에도 지금 이 자리/ 웃고 떠드는 나를 견딜 수 없다/ 아무래도 불꽃 머리칼 다시 길러야겠다/ 아무래도 나는 나를 다시 죽이러 가야겠다’(‘lady phantom’)
우리 시의 가장 앞선 면모를 보여주는 두 시집엔 ‘자궁’의 이미지를 담은 시편이 각각 들어 있어 비교가 흥미롭다. 김씨는 노곤한 운전 중 자동차 속을 자궁 같다고 여기면서 ‘먼 옛날 나의 시간이 시작되기 전 그 옛날/ 엄마의 뱃속은 참 시끄러웠지 교통의 요지였다니까’(‘은밀한 익사체’)라고 상상하고, 문씨는 표제시에서 외딴 야산의 폐가를 드나드는 사내를 관찰하면서 ‘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나온다.’며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라고 절창한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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