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7> 발가락-꼼지락거리는 관능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7> 발가락-꼼지락거리는 관능

입력
2008.04.06 18:06
0 0

발가락은 ‘발’에 ‘가락’이 붙어 생겨난 말이다. ‘가락’은 가늘고 길게 도막낸 물건의 낱개를 가리킨다. 발가락말고도 손가락, 머리카락, 엿가락, 가락엿, 젓가락, 숟가락, 윷가락, 가락윷, 가락국수 같은 말들에 이런 뜻의 가락이 보인다. 가락지(예전에 기혼여성이 손가락에 끼던 두 짝의 장식용 고리)의 ‘가락’ 역시 한가지일 테다. 중세한국어에선 ‘가락’이 저 홀로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가리키기도 했다.

‘가락’은 동사 ‘가르다’의 어근 ‘갈’에 접미사 ‘-악’을 덧붙여 만든 명사다. 그러니까 가락은, 본디, ‘갈라진 것’이라는 뜻이다. 발가락은 발에 붙은 가락, 발에서 갈라져 나온 그 무엇이다. 어근이 동사가 아니어서 ‘가락’과 형성 방식이 같진 않지만, ‘아낙’(안 + 악)이나 ‘뜨락’(뜰 + 악: 그러나 ‘뜨락’은 현재 표준어로 인정되지 않는다) 같은 말에도 명사화 접미사 ‘-악’이 보인다.

■ '가락'의 어원 '가르다'는 성행위 주체 男-女 연상

민첩한 한국어 화자라면 발가락의 ‘가락’이나 머리카락의 ‘카락’이 동사 ‘가르다’에서 나왔다는 걸 대뜸 짐작할 수 있다. ‘갈래’, ‘갈림길’, ‘가리마’, ‘가랑이’, ‘가래’(엿가래, 가래엿, 가래떡, 석가래, 넉가래 같은 말들의 ‘가래’), ‘가랑무’, ‘가랑머리’ 같은 말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한국어 화자의 평균적 감수성 속에서 어렵지 않게 ‘가르다’와 이어진다.

그러나 ‘가닥’(갈려나온 하나하나의 올이나 줄), ‘까닭’(이유나 속셈), ‘갈피’(사물의 갈래가 구별되는 어름이나 겹쳐진 물건의 한 겹 한 겹 사이), ‘가리새’(일의 갈피와 조리. 줄여서 ‘가리’), ‘가리사니’(사물을 가리어 헤아릴 실마리) 같은 말들은 어떨까? 이 말들에서 대뜸 ‘가르다’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말들도 엄연히 ‘가르다’의 가족이다.

이런 말들은, 직설로든 비유로든, 정신의 분별 작용과 관련이 있다. 당연하다. 가른다는 것은 곧 나눈다, 자른다, 연다, 찢는다, 빠갠다, 쪼갠다, 벤다는 뜻인데, 바로 이런 분절(分切)이야말로 이성(理性)과 합리성의 다른 이름이고 지성의 밑절미이기 때문이다.

가른다는 것은 분별하고 분간한다는 것이다. ‘가르다’에서 온 명사 ‘가름’에도, 따로 따로 갈라놓는 일이라는 일차적 뜻말고, 분별이라는 뜻이 있다. 지니고 있는 한국어사전을 들춰보니, 그런 뜻의 ‘가름’을 지닌 예문으로 “아내의 도리와 남편의 도리가 저마다 가름이 있어야 한다”를 제시하고 있다. (좀 구리터분한 예문이긴 하다.)

한국어사 분야에서 훈련을 받은 언어학자라면, 여기서 더 나아가 가위, 칼, -끄덩이(머리끄덩이), -가리(졸가리), -거리(줄거리), 고르다, 가르치다, 갈다(交替) 같은 말들을 ‘가르다’와 연결시키며 형태소의 족보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르다’와 ‘가락’의 친족을 찾는 일을 이쯤에서 멈추고, 이 말이 어떻게 사랑의 말이 될 수 있는지를 살피자.

‘가르다’가 분별의 동사라면 얼핏 사랑이나 연애와는 대척에 놓인 말처럼 보인다. 사랑이란, 연애란 흔히 무분별의 감정이고 행위니 말이다. 그러나 사랑의 육체적 형태인 성행위는 여성과 남성의 가름을 전제로 삼는다.(이것은 물론 이성애적 관점이다. 그러나 동성애 역시 성행위자들의 구별을 전제한다.

섹스는 두 육체가 하나가 되는 과정이지만, 그것의 전제는 분리된 육체다. 심지어 자위행위 역시, 그것이 전제하는 것은 위로하는 육체와 위로받는 육체의 관념적 구별이다.) 그러니까 성은 갈라짐 위에 존재한다. 이것을 먼저 제 언어에 반영한 것은 서양사람들이었다.

성(性)이라는 말은 동아시아 철학의 전통 속에서 심오하고 복잡다단한 개념들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여기서 흘긋 엿보고 있는 성은 개화기 이후 서양말 ‘섹스’의 역어로 일상 한국어에 편입된 ‘성’이다.

그 ‘성’의 원어 섹스는 라틴어 섹수스(sexus)를 차용한 것인데, 이 섹수스는 ‘가르다, 자르다, 나누다’ 따위의 뜻을 지닌 동사 세카레(secare)와 연이 닿아 있다. 그러니까 섹스가 처음 뜻했던 것은 ‘(동물이든 식물이든 한 종의) 갈라짐, 나뉨’이었다. 물론 그 갈라짐이란 여성과 남성(암컷과 수컷)으로의 갈라짐이다.

‘섹스’를 그 본디 뜻에 맞춰 고유한국어로 직역한다면 ‘갈래’가 될 테다. 그러나 가장 열정적인 국어순화론자들도 ‘섹스’나 ‘성’을 ‘갈래’로 바꾸자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웃음거리가 될 용기가 늘 애국심을 이기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아무튼 ‘발가락’의 ‘가락’은 동사 ‘가르다’에서 나왔고, 이 동사에서 나온 또 다른 명사 ‘갈래’가 섹스의 본디 뜻이었다는 점만 지적하자.

■ 꼬물거리는… 귀여움 넘어 아름답기까지 한

해찰하느라 지면을 낭비했으니 서둘러 발가락으로 되돌아가자. 발가락은 몸의 오지이자 말단이다. 다섯 개 발가락이 모두 고유한 이름을 지닌 것은 아니다. 엄지발가락과 가운뎃발가락, 새끼발가락 셋만 제 이름을 지녔다. 그 발가락들 사이의 발가락 둘을 굳이 부르자면, 둘째 발가락, 넷째 발가락이라 부를 수는 있겠지. 반면에 거기 해당하는 손가락들은 제가끔 집게손가락, 약손가락처럼 버젓한 이름을 지녔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둘째손가락으로는 물건을 집을 수 있는 데 비해, 둘째 발가락으론 그럴 수 없다. 넷째손가락으로는 탕약을 찍어 맛을 볼 수 있는 데 비해, 넷째 발가락으론 그럴 수 없다. 발가락은 손가락처럼 사람의 사지 끝머리를 이루고 있고 그 뼈의 구성도 같지만, 그 쓸모가 손가락에 크게 뒤진다.

꼼지락거리는 굴신운동말고 발가락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손가락 덕분에 우리는 호모파베르가 되었지만, 발가락이 인류문명에 이바지한 바는 퍼뜩 떠오르지 않는다. 발가락은 인류의 역사 내내 그저 꼼지락거렸을 뿐이다. (혹시 발가락이 직립과 발돋움에 도움이 됐으려나?)

그러나 발가락의 꼼지락 운동은 그것을 우리 몸의 가장 귀여운 부분 가운데 하나로 만든다. 어린아이의 발가락이든 할머니의 발가락이든 청년의 발가락이든, 꼬물거리는 발가락은 귀엽다. 더 나아가 아름답다. 그리고 그 귀여움과 아름다움은 설핏 관능을 낳는다. 내 발가락을 누군가의 발가락에 댈 때, 누군가의 발가락을 내 혀로 핥거나 내 이로 살짝 깨물 때, 나는 그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우리는 연인이다. 발가락을 꼬물거릴 때, 우리는 호모루덴스다.

김동인의 단편 <발가락이 닮았다> 에서 발가락은 성이 아니라 생식이나 유전과 이어져 있다. 성병을 앓은 뒤 생식능력을 잃게 된 이 소설의 인물 M은 아내가 낳은 아이의 발가락을 제 발가락과 견줘보며, 그 닮음에 기대, 아내의 부정(不貞)을 억지로 부정(否定)한다. 여느 동물들에게 성은 오로지 생식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겐 다르다. 동성애자들의 섹스나 이성애자들의 피임은 사람이 생식과 성을 분리했음을 보여준다.

발가락이 손가락보다 더 관능적이듯, 발도 손보다 더 관능적이다. 그것은 발이 손보다 더 은밀한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버선이나 양말은 발을 보호하기 위해 발명된 물건이지만, 그것의 부차적 쓸모는 발을 감추는 데도 있을 것이다. 이슬람 여성들이 제 얼굴을 감추듯, 이슬람 문명 바깥의 여성들도 흔히 제 발을 감춘다. 그들에게 발은, 젖가슴처럼,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될 그 무엇이다.

■ 드러내지 않아 보고싶은… 中 전족은 성적 페티시

옛 중국 남자들은 여자의 발을 헝겊으로 굳게 묶어 자라지 못하게 함으로써, 조그마한 발을 성적 페티시로 만들었다. 이것이 전족(纏足)이다. 이 기괴한 풍속은 14세기 초 중국을 방문한 북부 이탈리아 프리울리 출신의 프란체스코회 선교사 오도리코 다 포로데노네를 통해 유럽에까지 알려졌다. 전족은 20세기 초 여성운동 덕분에 사라졌지만, 지금도 중국인들은 여성의 작은 발을 큰 발보다 더 아름답게 여긴다 한다.

하긴 중국인들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한국인들도, 작은 얼굴을 좋아하듯, 작은 발을 좋아하는 듯하다. 에른스트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며 소위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이라는 것을 제창하기 오래 전부터, 동아시아 사람들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여겼다. 일본 사람들의 분재 취향을 보라.

그러나 아름다운 것이 꼭 작아야 하는 것은 아닐 테다. 큰 발(가락)이든 작은 발(가락)이든, 새끼발가락이 가장 크든 가운뎃발가락이 가장 작든, 그 발의 주인에게 반한 사람의 눈에는 그게 미워 보일 리 없다. 오늘 저녁엔(낮이라도 좋고) 제가끔 연인의 발가락을 한번 살펴보자.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터넷한국일보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