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등 정부 대표단이 뉴욕에서 무디스 S&P 등 국제 신용평가회사 관계자들과 회담했을 때다. 정부 대표단은 당시 북핵 6자회담 재개, 4~5%대의 안정적 성장률, 외환보유액 2,500억 달러를 내세워 국가신용 등급을 올려줄 것을 요구했다.
정부는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경제기초체력)이 호전됐는데도 수년째 신용등급을 올려주지 않은 무디스 등에 잔뜩 화가 났던 터였다. 우리측은 신용등급을 상향조정하지 않으면 이들의 한국 내 사업에 제한을 가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하며 압박했다. 하지만 신용평가회사 관계자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이유로 남북문제, 즉 한반도 컨트리 리스크(country risk)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점을 내세웠다.
■ 신용등급 발목잡는 남북문제
무디스와 S&P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평가할 때 컨트리 리스크를 가장 중시한다. 이들은 거시경제 지표들이 아무리 호전돼도 남북한 긴장이 높아지면 신용등급을 올리는 데 매우 인색했다. 우리 경제규모가 세계 13위권인데도 무디스와 S&P의 국가신용등급이 각각 A2, A로 1997년 외환위기 전보다 1~2단계 낮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신용평가회사들은 금융위기를 겪는 국가들에 대해 선제적인 신용평가를 하지 못하고 뒷북만 치고 있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매긴 국가 신용등급은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환란 후 신용등급을 제때 올려주지 않아 우리를 애타게 하고 있는 무디스와 S&P 관계자들이 이달 중순 방한, 정부 관계자들과 정례회의를 갖는다. 16일 서울을 찾는 무디스 대표단은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새 정부 경제정책과 대북정책에 대한 입장을 듣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고 한다. 이들은 미국에 돌아가면 한국의 신용등급 조정 여부를 밝힐 예정이다.
김태영 합참의장이 최근 ‘북핵 선제 타격론’을 밝힌 것을 계기로 남북한 긴장수위가 다시 높아지면서 경제에 미칠 파장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북한은 개성공단의 공무원 철수 요구, 미사일 발사에 이어 남북 간 대화 중단 및 군사적 대응까지 거론하며 정부를 협박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논란이 많았던 김대중 및 노무현 정부의 포용정책 대신 상호주의에 입각한 대북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북이 핵 포기 등 전향적 자세를 취하지 않는 한 대북 퍼주기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지나친 정공법으로만 대북 문제에 접근할 경우 경제에 적지 않은 주름살을 줄 수 있다. 긴장 고조로 지정학적 리스크가 올라가면 외국인의 ‘셀 코리아(한국 주식 등 매도)’ 현상이 발생, 금융시장이 동요할 수 있다. 이는 규제 전봇대 뽑기를 통한 투자 활성화와 외자유치로 성장동력을 확보하려는 새 정부 경제 정책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다.
■ 경협은 통일 대비한 기회비용
개성공단에는 남한의 인건비 급증을 못 견딘 수백개 중소기업이 진출해 있다. 북한이 우리측의 강경책을 빌미로 북측 근로자의 작업을 금지할 때 현지 기업들이 받을 충격도 고려해야 한다. 개성공단 등 남북협력공단은 중국에 진출한 중소기업 중 인건비 급등과 세 부담을 못 이겨 야반도주하는 한계 기업들에게 돌파구가 될 수 있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대북경협은 우리 경제규모의 10%에도 못 미치는 북한을 대화 틀 내에서 관리하면서 통일비용을 줄이기 위한 ‘기회비용’으로 봐야 한다.
새 정부는 이번 사태의 파장이 커지자 당당하면서도 유연한 대북정책을 전개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의 정책을 대체할 뚜렷한 액션 플랜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모호하다. 미국의 한 신문은 부시행정부가 종전과는 달리 대북 유화 제스처를 보이고 있는 반면 새 정부가 강경자세를 보이고 있어 미국 정부를 부담스럽게 한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대외부채는 4,000억 달러가 넘고, 증시에 들어온 외국인 자금도 300억 달러가 넘는다. 우리나라는 무디스 등의 신용평가 조정에 따라 금융시장이 출렁거리는 ‘작고 개방된 경제구조’를 갖고 있다.
이익춘 e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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