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매체를 통해서든 대중의 입을 통해서든 정의라는 단어를 접해본 것이 꽤 오래된 느낌이다. 우리사회에 정의가 실현되어 새삼스레 말할 필요가 없어졌거나,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딴 데 팔려 있어 정의에 눈 돌릴 여지가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분위기를 보면 둘째 이유가 더 타당해 보인다. 정치인들이건 기업가들이건 보통 사람들이건 심지어 대학생들이건 경제, 돈, 취업, 성공과 같은 물질주의적 가치들만 외칠 뿐, 그들 입에서 정의라는 단어를 도무지 들을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개인소득 2만 달러 시대가 되었으니 이제 돈! 돈! 경제! 경제! 하는 절박한 외침에서 조금은 벗어날 법도 한데, 그다지 넉넉지 못했던 70, 80년대보다 훨씬 더 절박하게 돈! 경제! 만 외치고 있으니, 정의라는 것이 꼭 잘 먹고 잘 사는 사회의 전유물은 아닌 게 확실하다. 2000년대 들어서 시작된 부동산값 폭등은 물질적 욕망에 불을 지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가슴 속에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던 정의감은 욕망의 불길에 전소되어버린 것 같다.
우리사회에서는 지금 가짜 정의가 판을 치고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혹은 ‘법은 강자의 정의’라는 속설이 통속적인 정의관이 되었다. 불법 탈법을 저지른 사람들이 한 점 부끄럼 없다며 버젓이 공직에 출마하고, 기업 비리를 폭로하면 오히려 은혜와 의리를 저버린 패륜아로 매도될까 두려워할 지경이 되었다. 사람들 역시 웬만한 부정부패와 비행에 대해서는 그만한 짓 안 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거나, 모두가 거기서 거기니 도덕성은 따지지 말자는 풍조에 휩쓸려 버렸다.
나는 정의를 인간답고 문명화한 정치사회의 기초라 생각한다. 기본적인 정의가 실현될 때만이 인간답고 도덕적인 삶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정의가 실종되면 야만사회의 온갖 해악이 창궐하고 어떤 개인도 결코 안전하고 행복하며 도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최소치의 정의는 함께 약속한 것, 곧 규칙을 지키고 그 규칙을 공정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최하층 서민들의 기본적 생존권을 보장하거나, 누구에게나 기본소득을 보전해 주거나, 보다 평등한 부의 재분배를 도모하는 등 최소치 이상의 정의에 관심을 갖는 것은 차후의 일이다.
우리사회에서는 과연 최소치의 정의나마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가? 한국사회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는 매우 냉정해 보인다. 준법지수는 매우 낮고 부패지수는 상대적으로 매우 높아 경제력에 비해 한국사회의 ‘정의지수’는 간신히 중진국 수준에 턱걸이하고 있다. 경제동물이라고 비난 받던 70, 80년대의 일본보다 지금의 한국사회가 휠씬 더 물질주의적이고, 정의와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
지도자들이 공동체의 기본 법규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기업들의 불투명성과 도덕적 해이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상황에서 국제사회가 언제까지 한국사회의 경제적 성공만을 예찬해 줄까?
보다 인간다운 선진사회는 최소치의 정의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일정한 규칙 하에서 능력과 실적에 따라 부를 분배하는 것은 최소한도의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인간답고 도덕적인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 탓이 아니라고 경쟁의 패배자들과 소외된 자들의 절실한 ‘필요’를 외면하는 것은 부정의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인간적이거나 도덕적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 사회는 결코 살고 싶은 사회는 아닐 것이다. 최소치의 정의마저 무너져 내리는 현실에서 그처럼 인간적인 요청까지를 정의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한 이상주의자의 지나친 소망에 불과한 것일까?
김비환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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