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 국면에서 어느 학자가 햇볕정책을 2차 대전 직전 네빌 채임벌린 영국 총리의 대 나치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에 빗댄 글을 읽고 한심하게 여긴 적이 있다. 북한 핵을 막지 못한 햇볕정책을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으나, 북한 포용정책과 대 나치 유화정책을 나란히 놓는 것은 애초 아귀가 맞지 않는다. 당시 영국과 지금 우리의 처지, 총체적 안보 상황이 아주 다른 것을 무시한 때문이다.
'안보 상황' 이성적으로 봐야
무엇보다 그 즈음 영국은 국력과 군사력이 나치 독일에 크게 뒤졌다. 반면 우리 국력은 북한의 몇 십 배에 이르고, 군사력도 핵을 제외하면 우세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객관적 사실 또는 평가를 애써 외면하는 것은 우리의 안보 상황을 이성적으로 가늠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왜곡된 인식을 부추기고, 여론뿐 아니라 정부 정책에도 그릇된 영향을 줄 수 있다.
남북관계가 불안해지는 것을 보면서 읽기 불쾌했던 글을 떠올린 것도 이 때문이다. 나름대로 메시지를 또렷하게 각인하려는 시도이겠지만, 과학적 논리와 거리 먼 선정적 비유를 앞세운 것은 학문하는 자세가 아니다. 더욱이 갈등을 완화하고 평화를 좇는 길을 탐구하기보다 완고한 대북 인식을 새삼 부추기며 강경 정책을 부르짖는 것은 지식인의 도리가 아니다.
물론 물색 없는 주장에 사회와 정부가 마냥 솔깃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남북관계의 긴장이 사회 분위기와 정책 변화에서 비롯됐다고 몰아 부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걸 북한의 망상ㆍ망동(妄動) 탓으로 치부하는 것은 생각하긴 편할지 모르나 마음의 평화를 안겨 주지는 않는다.
이런 혼란에서 벗어나려면 북한의 속셈을 열심히 분석하고 어리석고 위험한 책략을 꾸짖는 데만 매달릴 일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그릇된 인식과 가정에 얽매여 갈등을 조장하는 언행을 때로 자랑 삼아 하고서는 언뜻 갑작스러운 정세 악화에 당황해 하지는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채임벌린 이야기를 마저 하자. 그가 유화정책을 상징하는 뮌헨 협정을 히틀러와 맺은 1938년, 독일은 국력과 군사력의 지표인 철강 생산력부터 영국 프랑스를 합친 것보다 앞선 강대국이었다. 반면 영국은 국력이 위축되면서 재정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에 따라 채임벌린의 평화노선은 집권 보수당과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함께 독일과 맞설 프랑스도 유화 자세를 취한 상황에서 그가 뮌헨 협정을 맺고 귀국, 유명한 '우리 시대의 평화' 연설을 했을 때 영국인들은 열광했다. 그 환호는 이듬해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이은 2차 대전 개전과 함께 거센 비난과 사임 요구로 돌변했다. 그는 안이한 판단으로 나치 야욕을 막지 못한 '실패한 지도자' 낙인이 찍혔다.
그러나 오늘 날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다르다. 채임벌린은 평화 소신에 이끌렸지만, 영국 처지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시각이 많다. 그는 마지막까지 평화정책을 추구하면서도, 뒷날 영국 방어에 수훈을 세운 신예 전투기 개발과 특수전 사령부 창설을 서둘렀다. 전쟁 발발 뒤 언론이 앞장선 '죄인 찾기'에 쫓겨 사임한 뒤에는 윈스턴 처칠 내각에서 전쟁 수행을 도왔다.
위험과 비판 무릅쓴 평화 노력
1940년 11월 그가 암으로 숨지자, 오랜 정적인 전쟁 총리 처칠은 이렇게 애도했다. "평화는 어떤 위험과 비판도 무릅쓰고 추구해야 한다. 사악한 무리가 모욕했지만, 고인의 평화를 위한 숭고한 신념과 인내와 노력과 투쟁은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이를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유려한 수사로 읽을 건 아니다.
역사적 조건이 판이한 영국과 우리의 경험과 현실을 올바로 비교하는 것으로 곧장 평화를 위한 길에 이를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의 목표가 무엇인지 잊거나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 북한 핵 문제가 심각하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갈등과 긴장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어리석고 안이하다.
강병태 수석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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