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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13> 홍콩 영화계 거물 방한 "같이 일해볼 생각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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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13> 홍콩 영화계 거물 방한 "같이 일해볼 생각 없냐"

입력
2008.03.30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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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같은 일이 또 생겼다.

방송국의 급한 호출에 바짝 긴장한 나는 꾀죄죄한 바바리차림으로 남산으로 달려 올라갔다. KBS-TV 본관 건물 앞에 노란 인파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방송국 건너편엔 리라 초등학교가 있었다. 방과 후면 수많은 학생들이 유명 연예인들을 보기 위해 방송국 앞에 진을 치는 것이 행사였다. 노란색 모자와 망토를 걸친 리라 초등학교 학생들은 그야말로 병아리 떼처럼 아름다웠다.

늘 보던 광경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갑자기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인파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가운데로 방송국 수위 둘이 달려와 나를 방송국 후문으로 끌고 갔다. 그 뒤를 노란 병아리 떼가 ‘동궁마마, 동궁마마!!’ 외치며 나를 향해 달려 내려왔다. 그날의 타깃은 어젯밤 겨우 첫 방송이 나간 <연화궁> 의 ‘동궁마마’였다.

방송국에 들어서자 스탭들이 ‘V’자를 그리며 반겼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고PD가 내 어깨를 안고 국장실로 안내했다. 국장까지 어벙하게 들어서는 내 손을 꽉 잡는다. “축하합니다.”

그리곤 그의 곁에 섰던 두 사람을 소개한다. 한 사람은 주한 홍콩영사관 영사였고 한 사람은 홍콩영화사 관계자라고 했다. 지금 세계적인 홍콩 영화사 대표가 서울에 체류하고 있는데 꼭 나를 만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겨우 첫 방송이 나갔는데... 지난 번 <다리> 가 나갔을 때는 대통령이... 이번 <연화궁> 이 나가니까 세계적인 영화사 회장이...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문득,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나는 반도 호텔 만찬장에 초대 받았다. 반도호텔 중국식당<용궁> 이었다. 이 식당은 한국에서 최고의 권력층과 재벌들이 출입한다는 초특급이었다.

입구 천정에서부터 황금색으로 휘어감은 용들이 입장하는 고객들의 자긍심을 최고로 올려주고 있었다.

입구에서 기가 죽어 서성이는 나를 금방 알아채고 한 중후한 인상의 남자가 달려왔다. <용궁> 주인 ‘왕 사장’이었다. 그가 안내한 특실 문이 열리자 웅장한 중국전통 가구로 잘 꾸며진 방이 나타났다. 낮에 만난 홍콩외교관, 영화관계자가 입구에서 나를 맞아주었다.

그리고 그들 너머 테이블에 앉아있던 한 ‘빼빼 마른’ 남자가 웃으며 일어나 악수를 청하였다. “반갑습니다. 나는 홍콩에서 온 ‘런런쇼’입니다.”

매우 차분하고 자상하여 호감이 가는 첫인상이었다. 그는 <연화궁> 의 나를 매우 인상적으로 보았다며 다짜고짜 세계 영화계로 진출할 의사가 없냐고 물었다. 나는 무슨 말인가 싶어 어리둥절하였다. 결심이 서면 연락하라고 명함을 주곤 나를 위해 최고의 음식을 준비했으니 부담 없이 즐기라고 했다.

그 날의 음식은 그 때까지 듣도 보지도 못했던 최고급이었지만 내 젓가락은 허공만 가르고 있었다. 국내 영화계에서도 빛도 못 보고 있는 주제에 감히, 내가 세계영화계에...

다음 날 조간 문화면에 런런쇼의 인터뷰 기사가 톱으로 올라 있었다.

<동남아시아에 365개 극장과 홍콩에 48개 촬영 스튜디오를 소유하고 년 5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는 아시아 최대의 영화제작사 쇼브라더즈의 회장인 세계 영화계의 거물, 런런쇼(run run shaw) 한국방문>

1960년 후반, 세계영화계의 판도는 요동치고 있었다. 유럽영화가 사양화하면서 허리우드 영화가 전성기를 맞았고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인도 영화가 침체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 때 홍콩에서는 자유도시의 이점을 내세워 중국 본토와 대만, 동남아의 영화 인력과 자본을 끌어들여 이탈리아, 할리우드, 일본 영화의 장점들을 뒤섞은 매우 가벼운 형식의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선봉에 <쇼브라더즈> 와 런런쇼가 있었다. 그는 대만의 국보적인 감독 이한상을 스카우트하여 <방랑의 결투> 를 만들었다. 홍콩 무협영화의 시조격인 이 영화는 동남아뿐만 아니라 무사영화의 원조국 일본의 시장까지 휩쓸어 버렸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본의 장님 무사영화 <자도이치> 를 뒤집은 <외팔이> 시리즈를 만들어 일본 영화 시장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그는 망명하는 중국의 유수한 영화인들을 홍콩으로 귀화하게 하고, 동남아, 인도, 대만, 일본 등에서 유망한 영화인들을 스카우트하여 홍콩을 아시아의 영화 중심지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선 외국영화는 쿼터에 묶여 연 10여 편이 상영되었는데 상업성이 뛰어난 할리우드 영화가 그 자리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유럽과 아시아 영화는 언감생심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그런데 홍콩 무협영화가 수입된다? 그렇다면 그건 홍콩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를 밀어낼 힘을 갖췄다는 상징적인 사건이 된다.

그 다음날 연이어 기사가 실렸다.

‘마침내 홍콩영화 한국에 상륙’

‘수입작은 이한상 감독의 <방랑의 결투> .’

런런쇼는 인터뷰에서 기염을 토했다. ‘아시아 영화의 세계화를 위해 한국의 능력 있는 감독과 스탭, 배우들을 홍콩으로 스카우트 하겠다.’

그 스카우트 대상 중의 하나가 나라는 얘기였다. 영화사로부터 전화가 빗발쳤고, 영화 관계자들로 연습실 밖은 마치 시장바닥 같았다.

AD는 결국 연습실 문을 잠궈 버렸다.

영화감독 하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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