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9일 토요일. 전날 저녁부터 비가 내렸다. 온몸이 으슬으슬하다. '뼛속에 스며드는 냉기'라는 게 바로 이런 날씨를 두고 하는 말일 게다. 옷을 두껍게 입고 나갔다.
예전에 3년 동안 은평구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곳에 살 때 '수색, 그 물빛무늬'라는 소설을 썼다. 그걸로 큰 상도 받고, 작품이 해외로도 번역되고, 나름대로 내게는 참 의미있던 시절이었다.
그런 그곳, 은평을 선거구가 이번 총선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다. 그냥 쉽게 말하자. 그곳은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의 아성이다. 40년 살았다고 한다. 3선 의원이고 이번이 4선 도전째다. 거기에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가 뛰어들었다. 그래서 방송도 신문도 이곳을 예민하게 지켜보고 있다. 두 사람은 애가 타겠지만 보는 사람들에게 은평을은 가장 재미나고 또 상징적인 지역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루 종일 두 후보를 따라다녀보기로 했다.
아침 8시 일산에서 택시를 탔다. 독바위 전철역으로 가자고 했다. 가는 중간 문국현 후보의 비서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애초 계획은 독바위 전철역에서 출근인사로 지역구민들을 만날 계획이었는데, 토요일이라 출근하는 사람도 많지 않고, 그래서 급히 일정을 바꾸어 진관사로 진관스님을 찾아뵙기로 했다고 한다.
그래. 그곳에 한양 4대명찰 진관사가 있지. 220년 된 느티나무가 비에 젖고 있었다. 선거고 뭐고 서울 삼각산 자락아래 이토록 아늑한 절이 있었다. 천년 고찰이고 6ㆍ25 때 불타버린 절을 진관 비구니스님께서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곧 문 후보가 와서 진관 스님을 만났다. 문 후보는 어머니가 청룡사라는 절에 다닌다고 했다. 진관 스님은 "어머니는 자식이 안보는 데서 등을 켜시는 분"이라고 했다. 진관 스님도 문 호보를 잘 알고 있었다. 누가 자기에게 이곳에 갑자기 후보등록을 한 문 후보에 대해 물어 "여기 있잖어" 하고 휴지통에 쓰인 '우리강산 푸르고 푸르게'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문 후보는 스님께 대운하 이야기를 했다. 문 후보가 굳이 이곳 이 후보의 아성인 은평을로 뛰어든 것도 운하 때문이다. 이재오후보가 이명박 대통령의 오른팔이어서가 아니라 한나라당 의원 가운데 가장 운하에 앞장서서 전도사로 나선 사람이기 때문에 크게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닌 은평을을 택한 것이다.
진관사에 이어 방문한 수국사에서도 운하를 얘기했다. 그리고 은평 뉴타운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그냥 아파트만 빼곡하게 들어서는 베드타운이 되서는 안되고, 그 안에서 환경을 생각하고 문화와 교육, 경제가 함께 이루어지는 새로운 도시로서의 생명력에 대해 말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조용조용 가까이 앉아 상대 의견을 경청하며 자기 생각을 연구실의 학자처럼 어떤 자료와 근거를 바탕으로 전한다. 후보에게는 늘 다음 일정이라는 게 있는데, 어디에 방문하거나 앉으면 다음 일정을 생각 않고 나누고 있는 이야기에 깊이 빠진다. 학자풍의 대화 속에서도 금방 친화력이 생기는 것도 그래서인 것 같다. 대신 죽어나는 사람은 다음 일정을 생각해야 하는 비서관인데 그는 비가 와도 뛰지않을 사람처럼 여유롭다. 그 속에 사람을 조용히 빨아들인다.
그 시간 이재오 후보. 5시에 일어나 새벽기도에 참석하고, 6시에 늘 다니는 등산코스로 가서 동네 등산객들의 손을 잡고, 또 케이블 방송에 출연하여 자신의 정견을 녹화하고, 지역구 지인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해 축하 인사를 하는 것으로 오전 일정을 소화했다.
'은평 발전 완성하겠습니다.' 이 후보의 선거 캐치프레이즈다.
구산역 사거리에 위치한 이 후보 사무실을 찾아간 것은 오후 1시. 이 후보 방에 들어서자 지난해 가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이후 자전거를 타고 운하예정지를 '토의(土衣)종군'하던 시절의 사진도 놓여 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의 대부분 후보가 그렇듯 이 후보도 운하논쟁에서는 비켜서고 싶어하는 인상이었다. 책장 한편엔 '위원장 이재오'에서부터 '원내총무 이재오' '사무총장 이재오' '원내대표 이재오'까지 그가 정치인으로 성장해온 지난 시절에 대한 물증과도 같은 명패가 나란히 놓여 있다. 그는 이곳에서 정치적으로 성장해왔고 또 자기만의 확실한 아성과도 같은 지역구를 구축해온 것이다.
오후 2시 불광초등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불광3구역 주택재개발 정비사업 조합원총회에 이 후보도 참석했다. 그는 청바지에 한나라당 로고가 새겨진 점퍼를 입었다. 일부러 연출한 모습이 아니라 평소 모습이란다. 소탈해보인다.
300명 정도의 조합원이 모였는데, 사람 있는 곳을 놓칠 후보들이 아니다. 문 후보도 인사차 들르고 친박연대의 장재완 후보도 명함을 나눠주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오랜 지인들처럼 후보들은 서로 인사를 나눴다.
오후 들어 이 후보는 본격적으로 지역구 돌기에 나섰다. 제일 처음 인사를 한 사람은 포장마차 주인 아주머니. 어느 가게를 들어가든 사람들이 이 후보를 반긴다. 길에서 만난 어느 사람에겐 "전에 아프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요즘은 좀 어떠냐"고 묻기도 했다. 지역주민 한 사람 한 사람 사정을 꿰뚫고 있는 것은 분명 그의 장점이다. 17대 탄핵 총선에서도 그 힘을 바탕으로 3선에 성공했다.
선거는 바람으로도 치르고, 조직으로도 치른다고 한다. 문 후보는 운하반대 명분을 타고 이곳으로 왔고, 이 후보는 누구보다 탄탄한 지역적 뿌리와 조직을 바탕으로 낙후된 지역개발 공약을 내걸고 도전을 막고 있다. 스케치 당일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문 후보가 앞섰다. 그러나 그건 여론조사일 뿐 실제 그 표가 투표소로 나오게 하는 조직력에서는 이 후보가 단연 앞서 있다.
거물들의 일전이 벌어지는 이곳, 18대 총선의 상징적 의미가 있는 이곳 은평을. 지금 이곳에서 두 후보는 골목골목을 돌며 주민들을 만나고 손을 잡고 안부를 묻고 있다. 누가 이길 것인가. 끝까지 지켜보고 싶은 곳이다.
● 소설가 이순원 누구
이순원은 강원 강릉 출신으로 1988년 문학사상에 소설 <낮달> 로 등단했다. 어려운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소설가로 본보 '길 위의 이야기'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96년 소설 <수색. 어머니 가슴으로 흐르는 무늬> 로 제27회 동인문학상을, 2000년에 소설 <그대 정동진에 가면> 으로 제5회 한무숙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06년에는 제2회 남촌문학상을 받았다. 그대> 수색.> 낮달>
이순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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