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셈을 탐내고 여림을 깔보는 것은 자연선택이 다듬어놓은 생존원리다. 적자생존은 흔히 우승열패의 에두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올림픽을 비롯한 스포츠이벤트들은 육체적 정신적 강건함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시끌벅적하게 펼쳐놓는다. 모진 훈련과 엄한 군기로 다져진 해병대원들을 어느 사회나 ‘진짜 군인’으로 떠받드는 것도 사람들이 강인함을 선망하기 때문일 테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람은 가냘픈 것에 이끌리기도 한다. 맹자가 어짊의 고갱이로 여겼던 측은지심이 바로 가냘픔에 이끌리는 마음일 텐데,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옛사람들이 보기에도 사람의 본성 가운데 하나였다. 섬약하고 가녀린 것을 업신여기는 것도 사람의 마음이지만, 그것을 애달파하고 더러 기리는 것도 사람의 마음이다.
가냘픈 것에 이끌리는 마음은 연애에서 두드러진다. 사람들은 풍만하고 강건한 몸뚱이 이상으로 가냘픈 몸뚱이에 끌리고, 드센 성품 이상으로 여린 성품에 이끌린다.
그러니까 연애라는 비합리적 행위는 부분적으로 자기파괴 욕망에 떠밀리는 것 같다. 여자들이, 근자에는 남자들도, 미친 듯 다이어트에 몰두하는 이유가 거기 있으리라. 여자들이, 근자에는 남자들마저, 연인 앞에서 제 마음을 여린 듯 가장하는 이유도 거기 있으리라.
용감한 사람만이 미인을 얻는다 했다. 그런데 여기서 미인(the fair)이란 말은 문득 가냘픈 사람(the frail)으로도 들린다. 서양사람들은 본디 이 문장의 주어를 남성으로 여겼고 목적어를 여성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동서를 가리지 않고, 이 문장성분들의 성이 모호해진 듯하다. 가냘픔은, 여성에게만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이제 정서적 소구의 무기다.
■ 가냘픔에 끌리는 또다른 이유는 만만해서?
냉소적으로 넘겨짚는다면, 사람들이 제 잠재적 연인의 가냘픔에 끌리는 이유 하나는 그 가냘픔이 안도감을 준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살이의 처절한 전투(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와 팍팍한 노동에 지친 정신과 육체가 연애라는 안식처를 간구할 때, 그 휴게소는 안전할수록 좋을 테다.
그런데 가냘픔은 일종의 미성숙함, 미숙함, 나약함이다. 가냘픈 연인은 제가 휘어잡을 수 있는 상대, 만만한 대상이다. 연인의 가냘픔 앞에서 사람은 제 존재감을 얻게 되는지 모른다. 비로소 자신이 굳세다는 느낌을.
가냘픈 것은 투명해서, 속이 훤히 비친다. 그것은 속여넘기고 속아넘어가는 것이 지배원리인 불투명의 생존공간에 한시적 무장해제의 쉼터를 마련한다. 그 가냘픔 앞에서, 또는 그 속에서, 사람들은 경계심의 갑옷을 벗고 누울 수 있다.
가냘픈 것은 곧 스러질 것 같고 바스러질 것 같다. 그것은 온실의 화초나 선반 가장자리의 유리잔 같은 것이고, 그래서 보는 이에게 보호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 연약하고 부드러운 것 앞에서 사람은 조심스러워진다. 여기서 조심스러워진다는 것은 경계심을 갖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섬세해진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 때의 조심이란 무딤의 반의어다. 저 스스로가 섬세함이기도 한 가냘픔은 제 둘레를 섬세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섬세한 마음의 공간을, 사랑의 공간을 장만한다.
■ 일종의 결핍… 활기를 나누고 싶은 욕망 불러
가냘픔은 일종의 결핍이다. 그것은 존재의 모자람이고, 생기의 부족이다. 가냘픔 앞에서, 사람들은 거기 생기를 불어넣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활기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가냘픈 것은 가련하고 서러운 것이니.
■ '어여쁘다'의 본디 뜻은 '불쌍하다'
‘어여쁘다’의 본디뜻이 ‘불쌍하다, 가련하다’였다는 사실은 연민과 미감을 한 솥에 비벼낸 한국인들의 상상력 한 자락을 보여준다. 굵고 둔중하고 실하고 우람차고 굳센 것이 판치는 세상에서 가냘픈 것은 사람들의 ‘어여삐 여기는 마음’을 북돋운다. 그들의 연민과 미감을 자극한다.
훈민정음은 제 백성을 ‘어엿비’ 여긴 세종의 마음을 질료로 삼아 만들어졌다. 세종의 백성은 가냘팠고, 그래서 그는 그들을 어여삐 여겼다. 불쌍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예쁘게, 사랑스럽게 여겼다.
어쩌면 사람들은 제 깊은 곳의 가냘픔을 숨기고 감싸기 위해 자기 바깥의 가냘픔을 사랑하는지 모른다. 그 때의 사랑은 넓은 뜻의 자기애일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은 궁극적으로 만인 대 일인의 투쟁이므로, 그리고 파스칼이 아니더라도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두렵지 않을 사람은 없을 터이므로, 사람은 궁극적으로 누구나 가냘프다. 그것이 사랑의 다함없는 연료다. 자기애든 아니든.
그렇더라도, 가냘픔에 대한 사랑의 밑자리는 어딘지 모르게 구부러진 마음, 쇄말적이고 도착적인 마음이다. 육체의 굳건함, 정신의 투박함은 그런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가냘픔이 존재의 모자람이라면 그것을 일종의 ‘되다 만 현실’, ‘미(未)현실’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미현실’의 느낌이 바로 구부러진 마음이고, 그것이 사랑을 낳는다.
■ 구부러지고 나약하고 쇠락의 아름다움
모자람이라는 말을 영도(零度)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가냘픔은 존재의 영도다. 아니, 뉘앙스나 실루엣이나 무늬라는 말이 더 맞춤하겠다. 가냘픔은 비현실이 아니라 미현실이니. 예감이라 해도 좋겠다. 가냘픔은 채 존재가 되지 못한, 존재의 예감이고 무늬다. 그래, 우선 가냘픔은 신체의 실루엣이다.
채 신체에 이르지 못한 그 가느다람이 또 다른 신체를 유혹한다. 잘록하고 홀쭉한 육체에 또 다른 육체가 이끌린다. 가냘픔은 정신의 뉘앙스이기도하다. 형성의 도정에 있는 그 잠재적 배덕의 마음, 변덕의 마음이 또 다른 마음을 호린다. 어떤 아름다움은 움직임 속에, 변화 속에 있는데, 바로 가냘픔이 움직임이고 변화다.
그러니까 가냘픔은 휘어짐이다. 그것은 절개 없음이고, 지조 없음이다. 그것은 윤리적 결핍이다. 그러나 동시에 미적 잉여이기도 하다. 휘어짐은 나약함이고, 나약함의 끝은 죽음이다. 가냘픔은 쇠락의 아름다움, 데카당스의 아름다움이다.
가냘픔은 오목함이다. 부피가 커도, 볼록한 잔은 가냘파 보이지 않는다. 부피가 작아도, 오목한 잔은 가냘프다. 오목한 보조개는 가냘픔의 한 거처다. 가냘픔은 또 아슬아슬함이다. 그 아슬아슬함이 보는 이로 하여금 그것을 움켜쥐고 싶어하게 만든다. 오목함과 아슬아슬함에 끌리는 마음은 이를테면 소보다 사슴을 더 아끼는 마음과 닿아있다.
가냘픈 몸과 가냘픈 마음만 어여쁨을, 미적 쾌감을 낳는 것은 아니다. 가냘픈 불빛, 가냘픈 연기, 가냘픈 희망도 어여쁨을, 측은지심과 미적 쾌감을 낳는다.
1871년의 파리코뮌이 그 뒤 모든 모반자들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던 것은 그것이 내쏜 혁명의 불빛이 가냘팠기 때문이리라. 파리코뮌은 제 가냘픔을 통해 지지자들의 마음속에서 굳건함을 얻었다. 그 가냘픈 혁명은 기리고 이어나가야 할, 사무치는 희망의 빛살이었다.
■ 파리코뮌, 그 가냘팠던 혁명의 불빛
가냘픈 것에 대한 사랑은 잘고 보드랍고 고운 것에 대한 사랑이다. 잔모래의 보드랍고 고운 감촉에 대한 사랑이 가냘픔에 대한 사랑이고, 가냘픔의 사랑이다.
형용사 ‘가냘프다’는 ‘얇다’에 접두사 ‘가-’가 덧붙어 이뤄진 것으로 짐작된다. ‘가녀리다’가 ‘여리다’에 접두사 ‘가-’가 덧붙어 이뤄졌듯. 그러나 ‘가냘프다’를 ‘가늘고 얇다’로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녀리다’를 ‘가늘고 여리다’로 (제멋대로) 풀이할 수 있듯. 사실 이쪽이 더 그럴싸하다.
어느 쪽이 언어사의 진실이든, ‘가냘프다’ 속에는 ‘얇다’가 있다. ‘엷다’, ‘여리다’, ‘여위다’, ‘야위다’가 죄다 이 ‘얇다’와 한 뿌리에서 나왔다. 여윈다는 것은 얇아진다는 뜻이고, 가냘파진다는 뜻이다. 잠재적으로 여윈 내 마음과 몸이 실제 세계 속의 여윈 마음과 몸에 이끌린다. 사랑은 여윔의 심리고, 미감은 여윔의 감각이다. 아름다운 것은 여윈 것이고 가냘픈 것이다. 그 여윔과 가냘픔의 자력(磁力)이 사랑이다.
얄팍한 생각, 얄팍한 신의, 얄팍한 지갑을 꺼리면서도 사람들은 가냘픔에 끌린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가냘픈 것이기 때문이리라. ‘가냘프다’에 ‘가늘다’가 포함돼 있다면, 사랑을 낳는 것은 가느다란 신경일 테다. 사랑은 무딘 신경, 씩씩한 마음에서 나올 수 없다. 사랑은 가느다랗고 잘다. 모든 사랑은 잔정이다.
가느다란 것은 다 애잔하다. 가는허리나 가는 종아리만이 아니라, 가는 실, 가는눈, 가는귀, 가는 비가 다 그렇다. 그 애잔함에 이끌리는 마음이 사랑이다. 아니, 애잔함이 사랑이다. 가냘픔, 가녀림이 사랑이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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