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축소하기로 한 상호출자금지와 채무보증금지 제도는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를 결정한 상황에서 국내 대기업 규제의 마지막 보루로 꼽히는 제도다. 이 때문에 정부의 규제완화가 기준을 잃은 채, 선진국에서는 엄격히 적용하고 있는 제도까지 팽개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상호출자는 가장 악성적인 출자 형태다. ‘A사→B사→A사’로 이어지는 상호출자는 가공(架空)의 자산으로 기업을 무한증식 시킬 수 있기 때문. 이는 원천적으로 지배구조와 시장질서의 왜곡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안고있다.
상법에 모자회사(모회사가 자회사의 지분 50% 이상을 소유)간 상호출자 금지규정이 있지만 어겼을 경우 제재수단이 없고 계열사간 상호출자금지는 규정돼 있지 않아, 공정위의 규제가 유일한 상호출자 금지 수단이었다.
공정위는 자산규모에 따라 상호출자 금지제도의 적용을 받는 기업을 줄이는 것이지, 제도 자체를 폐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하지만 미국 유럽연합(EU) 영국 독일 일본 프랑스 등 선진국조차 자산규모와 상관없이 원칙적으로 상호출자를 철저히 규제하고 있다.
계열사간 채무보증금지제도 축소도 뜨거운 논란거리다. 10년 전 외환위기 때 기업들이 상호 빚보증으로 줄도산했던 쓰라린 기억 때문이다. 신용평가에 따른 대출이 관행화 된 선진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태다. 일본 정도가 한국처럼 기업간 채무보증 관행이 있지만, 한국보다는 덜 일반화돼 있다.
특히 채무보증금지제도의 경우 제도존속을 원하는 기업들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은행들이 무리하게 채무보증을 요구할 때, 그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특히 금융당국은 국내 은행들이 전근대적인 보증 형태가 아니라, 신용평가를 통해 대출을 해줄 것을 권고하고 있는데 이러한 방향과도 정반대로 가는 것이다.
공정위의 이번 업무보고는 이처럼 어느 정도 시장건정성을 훼손하면서까지 대기업들의 손발을 풀어주는 방향이지만, 중소기업들을 위한 새로운 제도도입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원자재 가격상승으로 인한 비용증가 요인을 납품단가에 반영할 수 있도록 근거조항을 만들겠다고 밝히고 있으나, 이 역시 힘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대기업-중소기업 관계에서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공정위는 더구나 직권ㆍ현장조사 축소를 공공연히 밝히고 있어, 중소기업의 어려움을 들어줘야 하는 역할을 방기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까지 더해진다. 공정위는 법위반 혐의가 상당하고 경쟁제한폐해나 소비자피해가 큰 경우에 한해 직권ㆍ현장조사를 벌이겠다고 밝혔으나 불공정 사례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찾아내야 한다는 시장의 지적과는 거리가 멀다.
이 때문에 공정위가 시장감시자, 경제검찰로의 책임을 져버리고, 사실상 일을 하지 않겠다는 뜻 아니냐는 반응까지 나오고 있다. 권영준 경희대 교수는 “시장의 규율을 아예 없애버리는 것 같아 공정위 발표 내용이 두려울 정도”라고 말했다.
이진희 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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