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용 민생 구호 앞에 경제원칙과 철학이 실종되고 있다. 무조건 퍼주는 것이 상책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숫자놀음에 불과한 목표치 제시도 허다하다. 마치 누가 더 많이 생색을 내느냐 경쟁하는 양상이다. 실현 가능성 따윈 애당초 부차적인 문제이고, 총선 표심이 유일한 목표로 떠올랐다. 일부 필수적인 민생 공약도 포함됐지만, 전반적으로 17대 총선 민생 공약 경쟁은 도를 한참 넘어섰다는 지적이다.
27일 정부와 정치권에 따르면 여야 총선 공약 중 민생과 복지 관련이 절반을 넘나든다. 한나라당은 250개 세부 실천과제 중 100개에 육박하고, 통합민주당의 300개 공약 중에서는 170개를 넘는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결코 달갑지 않다. 집권 여당 시절 30만개 일자리 창출 목표도 못 채웠던 민주당의 1순위 공약은 연간 50만개 일자리 창출이다.
대선 당시 연간 60만개 목표에서 최근 35만개로 대폭 물러선 정부와 한나라당보다 몇 걸음 더 나갔다. ‘강한 중소기업, 신(新) 성장동력, 서비스업 중심의 고용을 동반한 6% 성장’ 등 현 정부의 일자리 창출 방정식까지 흡사하다.
그러면서도 “이명박 정부는 연간 60만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지만, 현실은 절반 달성도 힘든 것으로 예측된다”고 비판한다. 한나라당의 일자리 대책은 친기업 일색이다.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금산분리 완화, 법인세율 인하, 규제일몰제 도입 등의 친기업 정책이 모두 일자리 대책으로 포장됐다.
서민 생활비 절감과 물가 대책도 구호만 가득하다. 누가 더 많이 내려주는지 경쟁이라도 하는 듯하다. 양당 모두 기름값, 통신비, 약값 등을 대폭 낮추겠다고 공약했다.
민주당은 유류세 10%를 추가 인하하겠다고 나섰고, 한나라당은 고속도로 통행료, 사교육비, 보육비까지 대폭 절감하겠다고 했다. 민주당은 현 정부의 공공요금 동결 방침이 “대증적 처방”이라면서 공공요금 상한제를 들고 나왔다. 더구나 구시대적 물가 관리라는 비판이 거센 정부의 50개 생활필수품에 맞서, 30개 생필품 물가지수를 개발한다는 공약까지 내놓았다.
내 집 마련 공약은 공허하고 반시장적이다. 한나라당은 서민들이 주택구입자금 10%로 내 집을 구입하도록 지원하겠다는 공약을 비중 있게 내세웠다. 주택 가격의 70%까지 대출해주고, 여기에 보증 20%를 붙여 총 90%까지 대출해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출 원리금이 연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DTI)이 40%를 넘을 수 없어 서민층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서민들의 이자 부담을 낮추기 위해 주택금융공사의 장기 모기지(보금자리론) 금리를 현 수준으로 유지한다는 공약은 시장원리에 정면 배치된다.
금융계 관계자는 “시중 금리가 오르는데 대출 금리를 고정한다면 공사나 정부가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으라는 얘기”라고 지적했다. 민주당은 수도권 요지에 3.3㎡ 당 600만원 이하의 저가 아파트를 수요에 맞게 충분히 공급하겠다는 현실성 낮은 공약까지 담았다.
이들 공약 대부분 정부 재정이 뒷받침돼야 하는 것들이지만, 재원 조달에 대해서는 양당 모두 한마디 언급이 없다. 고계현 경실련 정책실장은 “어떤 일정으로, 또 어떤 재원으로 수많은 민생 공약을 이행할 지에 대해 각 정당이 침묵하고 있다”며 “4년을 약속하는 총선 공약이 뒤늦게 발표돼 제대로 된 검증조차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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