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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1세대 김기탁의 한국을 세계에 팔다] (10.끝) 부침 많았던 한국 경제와 닮은 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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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1세대 김기탁의 한국을 세계에 팔다] (10.끝) 부침 많았던 한국 경제와 닮은 나의 삶…

입력
2008.03.1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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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이면 내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 팔순이 넘은 고령임에도 꼭 지킨다. 아침 9시가 되면 어김없이 서울 중구 소공동에 있는 삼화제지 9층 사무실로 출근을 하는 것이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지만 여전히 현장 실무자들의 아침 보고를 듣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지인들과의 오붓한 점심 식사도 내겐 큰 즐거움이다. 건강을 위해 스포츠 센터를 찾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일주일에 한 번은 공장을 견학해 현장 노동자들과 대화를 나눈다.

토요일은 나들이를 떠나는 날이다. 이 날 하루만큼은 사업도 잊고 신문도 보지 않는다. 거창할 건 없다. 가까운 시골에서 어머니 손맛의 시골 음식을 사먹고 드라이브 하는 게 전부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내 하루가 너무 고맙다.

일요일엔 교회를 찾는다. 지나간 일주일에 감사하고 내일을 살 수 있음에 또 감사한다. 다음 일주일은 내게 어떤 삶을 가져다줄지 기대하면서. 내 일상은 이렇게 소박하고 가지런하다. 물론 이 일상을 누릴 수 있다는 게 내겐 가장 큰 선물일 테지만.

한국 역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지켜본 내게 이런 평화로운 일상은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피죽 한 그릇 못 얻어먹던 시절이 있었고 성공적인 무역으로 큰 돈을 만져보기도 했다. 장사의 원리를 알게 되면서 나보다 소비자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결국 내게도 이득을 가져다준다는 명백한 진리도 깨달았다.

실패하고 고생하는 게 내겐 단단한 밑거름이 됐다. 실패는 성공의 계기가 됐고 불경기는 성장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여겼다. 바닥에서 늘 도약을 꿈꿨다. 긍정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까지 오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무역인으로서 부침을 겪는 게 다반사였던 내가 실패를 통해 성장했듯 한국 경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거대한 성장은 상상하기도 힘든 대기업들의 태동도 지켜봤다. 그 기업들이 흥하고 망하는 것도 봤다. 그 모든 걸 지켜 본 내 삶의 궤적은 한국 사회 성장 과정과 오롯이 닮은 셈이다.

그래서인지 재벌을 비롯한 기업을 바라보는 대중의 부정적 시각이 안타깝기만 하다. 지금 ‘기업인이 존경받는 사회’는 한국에서 상상하기 힘들게 돼 버렸다. 양적 성장을 해온 기업이 그에 발맞춘 질적 성장을 일궈내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거짓국과 냉면 한 그릇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구두 한 켤레를 15년간 신고 다니면서 온 몸으로 한국 경제를 일으키는데 큰 공헌을 한 기업인들도 있다는 걸 알아주길 바란다면 욕심일까.

그러나 마냥 인생무상의 감상에 젖어들 수는 없다. 내겐 ‘무역 1세대 마지막 생존자’라는 묵직한 타이틀이 있으니까. 그 타이틀을 내려놓는 순간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겐 마무리를 잘 해야 먼저 간 이들 곁에 나란히 설 수 있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 그래서 오늘 하루도 내가 뭘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거창한 말이 필요한 건 아니다. 춥고 배고픈 사람을 돕는 게 기업이 할 일 중 하나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뿐이다. 나는 얻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이 더 크다는 걸 알만한 나이를 훌쩍 넘었다. 가진 복대로 살고 욕심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도 너무 잘 알고 있다. 다행인 것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아 후회하지 않을 만큼 그 진리에 닿아 있는 삶을 어느 정도는 살아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내 남은 삶에 멋진 신세계가 펼쳐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소박한 일상이 멋진 신세계일지도 모른다. 기업가로서도 개인으로서도 단단한 삶을 살았다는 확신이면 충분하다. 다만 ‘기업인이 존경받는 사회’를 꿈꾸며 삼화제지 명예회장으로서 할 수 있는 실천은 여전히 내게 남겨진 몫일 것이다. 그리고 평생 따라 다니던 ‘무역1세대’라는 명예도 난 끝까지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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