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근 장아찌는 여름철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인 김치 겨울 내내 반찬 되네/ 뿌리는 땅 속에서 자꾸만 커져/ 서리 맞은 것 칼로 잘라 먹으니 배 같은 맛이지’ 고려시대의 문장가 이규보(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 에서 위와 같이 칭찬을 받은 먹거리는 무얼까? 동국이상국집>
‘박재은의 명품 먹거리’ 2회의 주인공이기도 한 식재료로 유럽에서는 기원전부터, 이 땅에서는 무려 천 년 전부터 재배되어 왔다.
힌트1 - 강화도 산을 최고로 친다.
힌트2 - 자주빛을 띄며 이쁘게 생겼다.
힌트3 - 최근에는 항암 효과가 있다는 논문까지 발표되었을 정도로 우리 몸에 이롭다.
정답은 바로 순무.
▲순무의 시대
임금님 진상 식단이었던 순무. <동의보감> 에 의하면 오장을 이롭게 하고, 간 기능 증진에 좋으며 숙취 해소, 비만증 & 변비 타파, 이뇨 작용 등의 효능이 있다. 간 질환이나 비만증 등은 모두 현대인에게 자주 나타나는 증상들인데, 그걸 고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식재료가 순무라니 매일 먹어도 모자라겠다. 술과 스트레스로 닳고 있는 나의 간을 고쳐줄 방법을 찾다가 알게 된 순무. 동의보감>
순무는 강화도에서 천 년 전부터 길러왔다. 강화도의 흙과 해풍, 기온은 영양가와 맛이 딱 들어맞는 최상의 순무를 만들어 낸다. 중국 <명의별록> 에서도 ‘순무는 오장에 이롭고 몸을 가볍게 하며, 기를 늘리는 식품’이라 말한다. 옛날에는 순무 씨를 말려 갈아서 죽을 쑨 다음, 왕비가 임신을 했을 때 보양식으로 올리기도 했다. 순무의 잔뿌리를 깨끗이 정리하고 얇게 썰어 날로 먹어보면 쌉쌀하면서 은은한 단 맛이 난다. 인삼 맛이 나기도, 고추냉이나 겨자를 톡 찍은 맛이 나기도 한다.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김치나 장아찌를 담그면 그 맛을 오래 즐길 수 있겠다. 순무를 납작납작 썰어 마늘, 생강, 파, 젓갈등과 버무려 만드는 순무김치를 찾아 강화도로 달려가 보았다. 명의별록>
▲‘우리옥’ 순무 김치
강화도 시장 골목에 위치한 우리옥(032-934-2427)은 50년 세월을 견뎌 온 밥집이다. 정다운 골목 초입에 가만히 있어 온 밥집. 가마솥에 장작을 때 강화 쌀로 밥을 지어주는 집. 직접 기른 각종 야채, 손수 딴 버섯, 아침마다 갈아내는 콩비지 등이 5,000원짜리 백반 상에 좌악 펼쳐진다. 실은 기자였던 남편이 결혼 전 취재를 했던 곳이기도 하여 늘 궁금하기도 했다.
특히 순무김치. 우리옥의 순무김치는 황석어젓으로 담그는데, 젓갈이 맛있다고 말하자마자 사장님의 깜짝 선물이 나왔다. 바로 통통한 젓갈 덩어리를 골라 한 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다 주신 것. 참고로, 나는 본래 황석어젓을 먹지 못했다. 냄새도 강하고 하여 번번이 시식에 실패했던 식재료.
사장님의 배려에 사양하지 못하고 황석어젓을 한 입 먹어보니 이런, 너무 맛있잖아! 오동통 질이 좋은 황석어젓은 씹는 맛이 푸아그라와 닮았고, 그 맛의 깊이가 오묘하여 한 입 뒤에 또 한 입을 부르는 매력이 있었다. 그냥 먹어도 맛있는 순무에 그냥 먹어도 맛있는 젓갈로 김치를 담갔으니 맛이 빼어날 수밖에.
순무김치를 아작아작 씹으면서 사장님께 여쭈기를 “새댁들이 순무김치에 도전하려면 주의사항이 있나요?”했다. 나직하고 차분한 말투로 “순무에는 물이 많지 않아서, 김치 담글 때 물을 좀 부어가며 해야 되요.” 원 포인트 알려주셨고, 순무 순을 똑 따서 새콤하게 버무린 찬도 들어보라 권하셨다.
잎은 칼슘 함량이 시금치의 몇배라는데, 간에 좋고 몸의 기운을 돋아주는 뿌리에다가 그 순까지 이렇게 맛있을 수가! 이규보 선생이 순무 칭찬을 줄줄 써내려간 심정을 헤아려 볼 수 있다.
▲순무 쇼핑
순무김치를 먹고 싶어 무작정 강화도로 향했지만, 사실 지금은 제철이 아니다. 그래도 산지까지 갔으니 순무를 좀 사오고 싶어 찾은 곳이 풍물시장. 강화 인삼, 강화 순무, 강화 쌀 등을 비롯해 직접 담근 젓갈류까지 살 수 있는 대규모 시장이다. 슬슬 둘러보다 맛있어 보이는 메뉴를 발견했다. 바로 순무 물김치. 풍물시장 1095호 하점김치(032-934-0210)의 물김치는 정갈하게 담겨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발그레하게 우러난 국물 색이 하도 예뻐서 한참을 살펴봤다. 김치를 담근 김복희씨는 끓여서 식힌 물을 붓고 사흘 정도면 무에서 발그레한 물이 빠져 국물 색이 예뻐진다고 귀띔해 주셨다.
수분이 적은 순무는 무작정 소금에 절이지 말도록. 무가 너무 질겨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순무 물김치를 담글 때 보통 강한 마늘을 생략하고 생강과 배즙으로 간을 보충하기도 하는데, 하점김치의 물김치는 배를 몇 쪽 썰어넣은 듯 시원한 맛이다. 비결을 너무 캐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것 같아 나의 추측으로만 묻어두었다.
조금씩 사 온 우리옥의 순무김치와 풍물시장의 물김치를 일주일째 먹자니, 빨리 순무 철이 왔으면 하는 마음이 절로 난다. 갓 지은 밥에는 물론, 파스타나 오므라이스 등 양식 메뉴와도 피클처럼 어울리는 맛甄? 우리옥 방영순 사장님이 직접 기른 순무를 사서 풍물시장에서 골라 산 젓갈을 넣어 직접 담가보고 싶어진다. 강화군 길상면에는 이규보 선생의 묘가 있다.
鼓舞風所職(고무풍소직) 被物無私阿(피물무사아)
바람의 하는 일은 장구춤 추듯 만물을 흔드는 것, 그 소임에 있어 차별이 없네.
- 이규보의 시 ‘妬花(투화)’에서.
이 봄에도 할미꽃에, 순무밭에 고른 해풍이 불고 고른 햇살이 내린다. 모순과 차별이 넘치는 세상과 달리 자연은 공평하게 베풀 뿐이다. 천 년을 이어 온 강화 순무의 맛같이 변치 않는 자연을 누리는 것, 그것이 스트레스에 찌든 우리를 위한 서바이벌 가이드다.
박재은ㆍ음식에세이 <밥 시> 저자 밥>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터넷한국일보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인터넷한국일보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