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과 단절하고 영국 국교회 창설을 감행할 정도로 사랑에 눈 멀었던 왕 헨리 8세. 헨리 8세와 치명적 매력으로 그를 사로잡았던 두 번째 왕비 앤 불린의 이야기만큼 영화와 드라마의 잦은 호출을 받는 역사도 드물다.
그러나 새 영화 <천일의 스캔들> 은 호출명단에 한 명의 주인공을 추가함으로써 수도 없이 반복된 이 낡은 이야기의 쇄신을 노린다. 앤의 동생이자 헨리 8세의 정부였던 메리 불린이다. 천일의>
역사의 ‘각주’에 머물렀던 메리 불린을 전면에 복권시킨 영화 <천일의 스캔들> 은 헨리 8세와 그의 사랑을 놓고 경쟁하는 두 자매의 삼각관계를 주축으로 회전한다. 야망이 여성의 죄악이던 시대, 사랑의 순수를 신봉하는 금발머리 메리와 사랑을 도구 삼아 권력을 획책하는 갈색머리 앤이 차례로 헨리 8세의 사랑을 얻고 비참하게 버림받는 이야기. 천일의>
가문의 중흥을 위해 아버지는 영리하고 아름다운 딸 앤이 헨리 8세를 유혹하도록 막후 조종하지만, 정작 왕을 사로잡은 건 메리의 청순한 관능이었다. 메리는 왕의 아이를 임신하고 앤은 질투에 사로잡혀 절치부심하지만, 젊은 호색한의 사랑은 유효기간이 짧았다. 앤은 여동생의 임신과 출산을 틈타 왕을 유혹하고, 이혼을 반대하는 로마 가톨릭과 영국 왕정을 결별시키면서까지 왕비가 된다.
할리우드가 가장 편애하는 젊은 여배우 나탈리 포트만과 스칼렛 요한슨을 라이벌로 등장시킨 이 영화는 기실 캐스팅이 알파와 오메가인 영화다.
하버드대 출신 나탈리 포트만이 영민하고 교활한 ‘팜므 파탈’ 앤으로, 할리우드 최고의 섹시 아이콘으로 연일 타블로이드를 달구고 있는 스칼렛 요한슨이 언니를 위해 사랑을 희생하는 ‘엥제뉘’(ingenueㆍ착한 여자) 메리로 변신했다. 헨리 8세 역은 <트로이> 의 에릭 바나. 트로이>
HD(고화질) 촬영으로 배우들의 미세한 얼굴 근육까지 잡아낸 영화는 과장을 좀 섞자면 카메라워크의 절반을 이들 배우의 클로즈업으로 충당하면서 캐스팅 본전을 톡톡히 뽑아낸다. 16세기 영국 궁정을 재현한 화려한 세트와 수백 벌의 드레스 등 휘황한 영상도 두 시간의 상영시간을 무리 없이 견디게 해준다.
그러나 영화는 지극히 단순화된 이분법의 인물 구도와 평면적인 캐릭터 설정으로 통속적 재미 이상의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영국 튜더왕조의 패리스ㆍ니키 힐튼 자매를 보는 것 같다”는 뉴욕타임스의 표현을 한국식으로 번역하자면, 튜더왕조판 ‘부부클리닉-사랑과 전쟁’을 보는 듯한 말초적 재미만 범람할 뿐.
필리파 그레고리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원제 <불린가의 또 다른 여인(the other boleyn girl)> 이 암시하듯 서사의 중심인물은 메리지만, 카메라가 지독히 균등하게 두 여배우에게 시선을 배분하는 탓에 보고 나면 캐릭터의 색깔이 짙은 포트만의 열연만 강하게 기억에 남는다. 불린가의>
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후 평범한 촌부로 여생을 살아가는 메리를 비추는 마지막 장면. 그녀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따스한 눈길은 앤을 극단적 캐릭터로 묘사했던 이 영화의 성적 보수성을 보여준다. 어쩐지 지략은 여성의 덕목이 아니라고 소곤거리는 듯하는. 감독 저스틴 채드윅. 20일 개봉. 15세 관람가.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터넷한국일보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인터넷한국일보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