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극장 ‘원각사’의 은세계 공연을 기점으로 삼은 ‘한국연극 100주년’ 기념을 위한 준비로 연극계가 분주하다. 그러나 정작 소극장이 밀집한 대학로는 100년의 피로를 겪고 있는 것일까. 스타의 광휘에 기대거나 각종 대중문화 콘텐츠를 전환해 호객하는 공연물들이 범람하고 있다.
소극장이 흥행사가 휘두르는 깃발의 먼지로 매캐할 때 아르코 대극장에서는 연극의 자리는 어디인가 묻고 있는 한 편의 연극이 막 공연을 끝냈다.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보이첵> (임도완 연출, 4일~10일). 2000년 초연 이래 여러 번의 손질을 거쳐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각광받고 ‘헤럴드 엔젤어워드’ 등을 수상하는 등 작품성을 검증받았다. 보이첵>
독일 표현주의 희곡의 기원이 된 뷔히너의 ‘보이첵’을 자신의 의자 하나 갖지 못한 사내, 평생을 쫓기고 서성여야 했던 사내로 해석한 이 공연은 원작을 무대 위 얌전히 서술되길 기다리는 텍스트가 아니라 다채로운 이미지의 화첩이자 배우들의 신체와 사물인 ‘의자’가 협연해내는 악보로 보았다. 텅 빈 무대 위 근육으로 다져진 배우의 몸들과 열 개의 의자 뿐. 절제함으로써 강력해진 조명과 피아졸라의 탱고음악으로 상승해가는 이 공연은 장면 장면이 잘 조형된 미장센으로 빛난다.
연극은 서막에 목재의자 하나를 분해하면서 시작한다. 한 사물이 분리의 폭력에 의해 본래의 용도와 속성을 잃고 해체되면서 다른 사물(격자, 총기, 쟁기, 가면 등)로 변해가는 과정이 상연된다. 마치 보이첵이 짧은 생애 동안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자신을 상실해가듯 말이다. 해부대 위에 누운 듯 두 개의 의자 끝에 간신히 몸을 걸치고서도 완벽한 평형을 유지하는 배우의 몸에 감탄하고, 의자들의 변검을 보는 듯 제 용도를 떠나 역동적 변용성을 펼칠 때 관객의 감각은 새로워진다.
의자는 엿보는 창이 되거나 실험쥐가 되어버린 주인공을 가두는 우리가 되고, 혼돈의 소용돌이를 그리기도 하며 심지어는 대용량의 맥주잔으로 비약한다. 칼을 사는 장면에서 의자를 층층 쌓고, 배우들의 흐느적대는 팔을 보태면 돈벌레 그리마의 절묘한 형상이 되면서 보이첵이 처한 가난과 물화된 현실의 그로테스크한 절정을 그려낸다.
다만 서사의 골격 면에서 사랑하는 여인 마리의 배신과 이로 인한 살인 쪽이 두드러지다보니 간통 자체에 대한 복수의 완성으로 막을 내림으로써 원작이 가진 깊이를 단선화한 점은 아쉽다. 그리고 배우들 면면의 볼거리 선사에 비해 대사를 전달하는 기량을 갖추는 데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우리 곁에 틀림없이 다시 돌아올 공연 <보이첵> , 몸과 오브제의 완벽한 조화 외에도 텍스트의 깊이에 대한 욕심을 한껏 더 부리기를 기대한다. 보이첵>
극작ㆍ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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