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맞았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피폐했다. 이 때 내게 주어진 첫 번째 임무는 상공회의소를 재건하는 일이었다.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상공회의소를 다시 세우고 기업 경제활동의 발판을 마련해야 했다. 상공회의소 건물을 짓기 위한 작업이 시작됐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건물을 지을 자리도 마땅치 않았고 돈도 없었다. 나는 경제활동을 위해서는 상공회의소가 필요하다는 걸 정부에 건의했고, 공적인 일이니 흔쾌히 도움을 주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일제시대 초등학교 부지였던 지금의 남대문 상공회의소 자리에 건물을 지을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정부 도움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순 없었다. 목돈을 마련하기 위해 운영비를 절약하고 또 절약했다. 건물 한 번 제대로 지어 운영해 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건물을 짓고 나니 서울 뿐 아니라 지방에도 상공회의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계기로 지방에도 상공회의소가 설립되기 시작했고, 그렇게 상공회의소는 제자리를 잡아갔다.
상공회의소에 몸담은 지 14년 가량 지나고 나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상공회의소 회장 자리를 놓고 정치적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단체 생활의 경우 어떤 이해관계에도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평생 변함없는 신념이었다. 결국 내 뜻대로 되지 않아 14년 몸담았던 상공회의소를 떠나야만 했다. 할 일은 다한 셈이라 여기고 미련 없이 상공회의소를 나왔다.
그 때가 1980년대 중반이었다. 상공회의소를 마지막으로 어떤 단체에서도 일을 하지 않았다. 이제 공직에서 손을 떼고 내가 만든 삼화제지를 야무지게 키워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정치적 압력에서 자유로울 때 떠나야 그 동안 열정을 쏟았던 단체 활동을 아름답게 마감할 수 있다고 느꼈다.
기업가로서의 열정 뿐 아니라, 단체 활동에 대한 애착도 강했던 셈이다. 무역협회, 상공회의소, 국세심판원, 금융통화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 등. 내가 몸담았던 단체들이 그걸 말해 주고 있다. 지인들은 우스개로 내가 단체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큰 재벌이 됐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체 활동을 통해 오히려 많은 에너지를 충전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공적인 일에 힘쓰고 크고 작은 문제들을 조정해 나가는 일이 적성에 맞았고,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역협회와 상공회의소를 키우기 위해 바닥에서부터 했던 노력들이 결실을 맺는 걸 보면서 무역으로 큰 돈을 벌어들일 때보다 더 큰 보람을 느꼈다.
상공회의소에서 물러난 후 이곳 저곳에서 단체 활동 권유를 받았지만 발을 들이진 않았다. 젊은 세대에게 자리를 내주고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무역협회 부회장과 이사, 상공회의소 회장, 중앙노동위원 등으로 일하며 늘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경력들이 여전히 나를 지켜주는 힘이기도 하다.
‘무역 1세대 마지막 생존자’. 지금 내 앞에 붙은 수식어는 이렇게 무겁다. 무역 1세대로 한국 사회의 성장과정을 그대로 봐왔고, 동고동락했던 지인들이 하나 둘 떠나는 모습도 지켜봤다. 그럴 때면 기업인으로서의 허무함을 느끼기도 한다.
먼저 떠난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기업인이 존경 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마지막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한다. 현재 88세의 나이지만, 나는 아직도 삶에 대해 치열한 고민을 한다.
삼화제지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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