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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10) "아들로 나온 사람 이름 뭐요?" 박정희 대통령 한마디에 다시 기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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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10) "아들로 나온 사람 이름 뭐요?" 박정희 대통령 한마디에 다시 기회가

입력
2008.03.09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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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나간 다음날 아침.

햇살이 미아리 판자 집 깨진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한참을 더듬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전 10시가 지나고 있었다. 아찔했다. 이 시간이면 이미 방송국 여기저기를 돌며 무슨 일거리가 없나 기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어젯밤 일이 순간 떠올랐다. 정신없이 “자동차 키 달란 말이야”라는 대사 한 마디를 날리곤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남산 길을 달려 내려왔었다. 간 곳은 이정길, 권창안과 자주 들르던 청계천 막소주 도매집. 소주 한 되에 꽁치 한 마리가 드럼통 위에 올라왔다. 낮에 경리부에서 받은 누런 봉투를 열어보았다. 처음으로 출연자 이름에 도장을 찍고 받은 ‘파우처’, 출연료였다. 만원 권 한 장, 천원 권 한 장, 그리고 동전 몇 개가 들어있었다. 몸이 뜨는 기분이었다. 앞에 놓인 소주잔 3개에 술을 부었다.

“정길아! 창안아! 한 잔 하자. 브라보!!”

나는 3잔의 술을 마셨다. 또 붓고 또 마셨다. 그 다음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허겁지겁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뜻밖에 주인아주머니가 밥상을 들고 왔다. 이 집에 둥지를 튼 지 1년이 다 되어가지만 이른 아침과 늦은 밤에나 드나들고, 월세는 막내누나가 직접 내기 때문에 아주머니와 마주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따뜻한 아침밥을 먹는 동안 아주머니는 내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다. 나는 엉겁결에 목동이라고 답했다. 이어 어제 좋은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웃으며 내가 밤새 노래를 불러제꼈다고 하였다.

노래 소리가 하도 커서 안채 식구들과 동네 사람들이 달려와 그만 하고 자자고 말려도 막무가내였다는 것이었다. 결국 동네 사람들이 뜬 눈으로 밤을 새고 아침에 출근들을 했단다. ‘고마운 사람들… 종일 막일로 고단했을텐데… 속까지 풀라고….’ 나는 미안해 고개를 수없이 숙이고 주인아주머니가 끓여준 해장국을 후루룩 마시고 방송국으로 내달렸다.

급했다. 버스를 탔다. 멀리 방송국이 보이는 남산 언덕을 달려 올라가며 어제 방송이 잘 못 나갔다고 야단을 맞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몰려와 멈춰 섰다. 선배들 반응을 먼저 들어보자며 음악실 다방 쪽으로 걸음을 돌리려는데 누군가가 방송국 쪽에서 고함치듯 나를 불렀다.

“하명종, 어디 가나?”

이 PD였다.

“빨리 뛰어와, 임마!”

‘아이고, 나 죽었다.’ 허겁지겁 달려간 내 등을 이 PD가 쳤다.

“전화도 없냐? 내가 여기서 널 몇 시간을 기다렸는지 알아?!”

이 PD는 급히 나를 방송국 국장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겁이 덜컥 나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내가 큰 잘못을 했나? 왜 나를 이렇게 ‘높은 사람’ 방에 데리고 들어가는 거지…?

“왔습니다. 야, 들어 와.”

PD가 떨고 있는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나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기듯이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방 안에는 국장으로 보이는 머리가 약간 벗어진 사람과 제작과장과 PD들, 그리고 작가 몇 사람이 들어오는 나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앉아요. 나 국장 박종국이요.”

나는 구석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언제 방송국에 들어왔소? 그동안 어떤 일을 했나요?”

나는 더듬거리며 그동안 방송국 생활을 이야기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고성원 PD가 물었다.

“연극은 해 봤단 말이죠?”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과장해서 자신 있게 대답했다.

“네. 국립극장에서 주인공을 했습니다.”

“됐군. 김 작가, 하명종씨한테 맞게 빨리 써줘요. 아주 잘 맞겠어요. 그리고 이 PD는 새 작품 들어가기 전까지 하명종씨 지금 드라마에 계속 등장시키구.”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계속 등장이라구…?’ 제작과장실로 자리를 옮겨 또 한 차례 차 대접을 받았다. 제작과장이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어젯밤 청와대에서 박대통령 내외분이 방송을 보다 문공부 장관에게 “아들로 나온 탤런트 이름이 뭐에요? 잠깐 나오고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오던데…”라고 물었다는 것이었다.

문공부 장관이 내 이름을 알 리가 없었다. 부랴부랴 KBS국장에게 전화하니 국장도 몰라 제작과장에게, 제작과장도 몰라서 PD에게 PD도 몰라서 밤새 전화가 북새통이 났다고 하였다. 어쨌든 박대통령 내외 덕에 첫 회에 교통사고로 죽고 사라져야 할 내가 다리에 기브스를 한 채 다음 회에도 출연하게 되었다. 그 드라마 제목이 아이러니하게도 <다리> 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리…인연….

그렇게 드라마에 계속 출연하자 충무로 영화계에서 감독들과 제작자들이 분주하게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합동영화사에서 신인 여배우 공모를 하는데 상대역을 맡아 달라고 하였다. 고은아씨와 윤정희씨가 공모에 응하였다. 고은아씨는 이미 제작자 곽정환 사장이 눈도장을 찍었고 윤정?씨는 최종 연기 및 카메라 테스트를 한강 모래사장에서 했다.

나는 상대역만 해주고 꽝이었다. 극동영화사에선 <춘희> 의 남자 주인공으로 뽑겠다며 불렀다. 그러나 오영일씨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충무로에서 수모를 당하는 동안 마침내 나를 주인공으로 놓고 쓴 첫 대본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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