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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3> 메아리 - 자기애와 교감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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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3> 메아리 - 자기애와 교감 사이

입력
2008.03.09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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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는 소리의 되울림이다. 산울림이라고도 하지만, 메아리가 산에만 사는 것은 아니다. 메아리는 우물 속에도, 고층건물들 사이에도, 동굴에도 산다. 그러나 우리들이 메아리와 가장 자주 마주치는 것은 산에서다. 어려서 배운 동요 <메아리> (김대현 작곡, 유치환 작사)는 “산에 산에 산에는 산에 사는 메아리/ 언제나 찾아가서 외쳐 부르면/ 반가이 대답하는 산에 사는 메아리”로 시작됐다. 메아리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이 산울림이라는 뜻일 테다.

메아리라는 말 안에 이미 ‘산(山)’의 뜻이 웅크리고 있는 것도 그래서 놀랍지 않다. ‘메아리’는, 어원적으로, ‘뫼(山)’와 ‘살(生)’에 접미사 ‘이’가 덧붙은 말이다. ‘뫼살이’ 곧 산에 사는 무언가가 바로 메아리다. 중세어 문헌에 ‘뫼살이’라는 형태가 곧이곧대로 드러나 있진 않다. 둘째 음절 첫 소리 ‘ㅅ’은 반치음으로 변해 있거나, 현대한국어에서처럼 탈락돼 있다. 또 둘째 음절 마지막 소리 ‘ㄹ’은 셋째 음절 첫 소리로 넘어가 있다. 소위 연철(連綴: 이어쓰기)이다(<월인석보> , <두시언해> 등). 그래도, 훈련된 국어학자라면, ‘메아리’의 마지막 두 음절 ‘아리’가 ‘살이(生)’의 변형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것이다.

국어학자가 아닌 일반인이라면, ‘뫼살이’의 ‘살이’(‘사리’)에서 ‘소리’를 떠올릴 수도 있을 테다. 메아리는 결국 산에서 나는 소리니까. 민중어원은 고답적 어원학보다 늘 더 발랄하다. 민중의 상상력이 역사언어학자의 상상력보다 더 발랄하다는 뜻이겠지.

메아리를 산과 잇댄 것이 한국인들만은 아니다. 적지 않은 유럽어에서 메아리를 가리키는 말 ‘에코’는 그리스 신화 속 요정 이름에서 왔다. 그 요정 에코가 산의 요정(오레아스)이었다. 산에는 숲이 있고 샘이 있고 골짜기가 있고 동굴이 있고 무덤(뫼)이 있다. 죄다 에코의 거처들, 메아리의 신성한 집들이다. 일본인 언어학자 고노 로쿠로(河野六郞) 선생에 따르면, ‘뫼’(‘메’)와 ‘마루’(宗)와 현대 일본어 ‘모리’(숲)는 모두 같은 뿌리를 지닌 말이고, 그것의 본디 뜻은 ‘신성한 산’이었다. 옛 일본어에서 ‘모리’는 신이 머무는 숲이나 산을 가리켰다. 한편, ‘산’을 뜻하는 몇몇 유럽어 단어의 기원이 된 라틴어 ‘몬스(mons)’의 인도유럽어적 기원은 ‘튀어나온’, ‘솟아오른’이라는 뜻이다. 봉우리나 산을 뜻하는 제주 방언 ‘오롬’(‘오름’)을 연상시킨다. 에코가 뛰놀던 고대 그리스에선 산을 ‘오로스(oros)’라 불렀는데, 이 말도 어원적으로 ‘솟아오른 곳’, ‘튀어나온 곳’이라는 뜻이다.

산의 요정 에코는 제 목소리를 사랑한 정령이었다. 그녀가 그 아리따운 목소리를 잃게 된 사연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스 신화의 주신(主神) 제우스와 그의 아내 헤라는 각각 바람기와 질투의 화신이라 할 만했는데, 에코는 헤라에게 재미난 얘기를 끝없이 해줌으로써 이 질투 많은 여신이 제 남편을 감시하지 못하도록 훼방놓은 적이 있다. 물론, 그 사이에 제우스는 요정들과 질퍽하게 놀아났고.

자신이 멍텅구리 취급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된 헤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녀는 에코에게서 목소리를 빼앗고 이 발칙한 요정이 오직 다른 사람들의 말을 되풀이할 수만 있도록 만들어버렸다.

목소리를 잃은 것, 언어를 잃은 것이 사랑을 잃은 것이라는 걸 에코가 깨닫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나르키소스라는 절세 미소년에게 반해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지만, 나르키소스는 자기가 한 말의 끝머리를 따라할 줄밖에 모르는 에코를 그저 기이하게만 여겼고, 사랑을 얻지 못한 에코는 어느 골짜기에서 비통한 마음으로 죽었다. 그 골짜기에는 에코의 목소리가 남았지만, 그 목소리조차 제것이 아닌 목소리였다.

메아리가 사랑의 말이라면 그 사랑은 자기애일 것이다. 에코는 헤라에게 벌을 받기 전부터 제 목소리를 사랑했다. 그녀가 저말고 다른 대상을 사랑하게 됐을 때 그녀에겐 이미 사랑을 실천할 능력이 없었고, 그래서 그 때도 그녀가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뿐이었다. 메아리는 목소리의 무늬지만, 제 목소리의 무늬다. 에코 처지에서는 제것 아닌 목소리의 무늬. 그것은 되울림일 뿐이고, 그래서 대화와 교감의 창이 닫혀 있는 자기애의 언어다. 출구 없이 매암도는 언어.

되울린 제 목소리를 사랑하는 이라면 되비친 제 모습도 당연히 사랑할 것이다. 에코의 사랑을 걷어찬 나르키소스가 자기애(나르시시즘)라는 말의 기원이 된 것은 그래서 우연찮다. 나르키소스는 헬리콘산의 한 샘에서 물을 마시려다 물속의 제 모습에 홀딱 반해 그 자리를 뜨지 못한 채 결국 기운이 빠져 죽었다. 물에 되비친 제 모습은 나르키소스가 사랑해 본 유일한 대상이었다. 그가 그런 자기파괴적 자蓚翎?빠진 것은 그에게 차여 상심한 어느 요정(에코였을 수도 있다)의 원한이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를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 요정은 이루지 못할 사랑의 아픔을 나르키소스가 겪기 바랐다.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서사시 <변신> 에서 들려준 이 나르키소스 이야기는 두 밀레니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며 메아리를 만들어냈지만, 그 이야기에 기대어 나르시시즘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은 1887년 들어서다. 이 말을 처음 쓴 이는 프랑스인 심리학자 알프레 비네다. 비네는 나르시시즘을 “저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페티시즘의 한 유형”이라 정의했다. 프로이트에서 라캉에 이르는 정신분석학의 대가들이 그 뒤 이 말의 정의를 다듬으며 거듭 사용한 데 힘입어, 나르시시즘은 오늘날 거의 일상어가 되었다. 성의학(性醫學)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영국인 의사 해빌럭 엘리스가 보기에 나르시시즘은 성도착이었고, 프로이트를 비롯한 주류 정신분석학자들이 보기에 나르시시즘은 성적(性的) 발달의 정상적 단계였다. 나르시시즘을 성적 발달의 정상적 단계로 본 이들에게는, 이것을 유아기의 자기색정(auto-erotism)과 어떻게 구별할 것이냐가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도착이든 정상적 단계든, 일상어에서 나르시시즘이 좋은 의미로 쓰이지는 않는다. 되비친 제 모습을 향한 열정은, 되울린 제 목소리를 향한 열정과 한가지로, 일종의 자위로, 불완전한 사랑으로 간주된다. 나르키소스가 넋을 읽고 쳐다본 샘물은 문명 사회의 거울에 해당할 텐데, 그렇다면 ‘거울’도 자기애의 언어일 것이다. 실상 나르시시즘을 다룬 정신분석학 문헌들에는 ‘거울’과 ‘거울단계’라는 말이 지천이다. 메아리가 흉내낸 소리이듯, 거울 속 영상도 본뜬 이미지다. 그것들은 그저 되풀이일 뿐이다. 거울의 사랑처럼, 메아리의 사랑도 재귀적이고 무성적(無性的)이다.

그러나 메아리가 이렇게 자기애의 언어, 재귀적 사랑의 말인 것은 오직 그 시초에서다. 메아리는 이내 은유를 통해, 한국어에서든 유럽어에서든, 공감이나 호의적 반응의 뜻을 덤으로 얻었다. ‘메아리(반향)를 얻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말이 사람들의 호의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뜻이다. 공감이 모든 사랑의 밑절미라면, 메아리는 온전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방향을 바꾼 소리의 물결이 메아리라면, 메아리는 대화의 언어다. 그 대화가 사랑의 시작이다. 공감하며 대화하는 마음들의 파동은 진폭을 늘였다 줄였다 하며 정서적 맥놀이를 만들어내는데, 은은히 울려 퍼지는 이 마음의 맥놀이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맥놀이가 만들어지기 위해선 두 파동의 진동수가 비슷하되 똑같지는 않아야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너무 다른 마음들은, 똑같은 마음들이 그렇듯, 사랑이라는 맥놀이를 낳기 어렵다.

그리스 신화의 에코에 얼추 대응하는 슬라브 신화의 메아리 여신 오즈위에나가 사람들 사이의 소통이나 수다와 관련돼 있는 것도 메아리의 자기폐쇄성에 서늘한 구멍을 낸다. 에코라는 말이 서양 신문들의 제호로 인기 있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다. 실상, 에코가 살았던 고대 그리스에서 보통명사 에코는 되울린 소리라는 뜻말고도 소음이나 소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일보> 칼럼 가운데 하나인 ‘메아리’도 그저 흉내낸 소리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 메아리는 되울려 퍼지는 민심이지만, 복제한 민심은 아니다. 그 메아리는 글을 쓰는 사람의 목소리와 그가 들은 목소리들이 접촉하고 간섭하며 빚어내는 공론과 사랑의 맥놀이일 것이다.

그러니까 메아리는 마음과 의견의 교호작용이다. 메아리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소리고, 사랑의 소리다. 메아리 없는 세상은 공감 없는 세상이고 교감 없는 세상이며 사랑 없는 세상이다. 얼마나 허전하고 무서운 세상일꼬.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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