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현대’라는 말이 내포하는 함의들은 대체로 이렇다. 난해, 혁신, 파격, 도발, 전복, 때로는 기괴.
서기 2008년, 한국 ‘현대’ 미술의 현주소를 볼 수 있는 독특한 전시가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명 ‘MEENA&SASA[44]KUKJE080307-080406’. 박미나(35)와 Sasa[44](37ㆍ우리말 ‘사사’로 읽음)가 국제갤러리에서 2008년 3월7일부터 4월6일까지 2인전을 갖는다는 뜻이다. 수집과 차용, 조합과 변형의 변증법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두 ‘예술 동지’를 전시장에서 만났다. 2001년부터 따로 또 함께 작업해온 오타쿠(수집광) 작가들이다.
◆미나: 기의와 기표의 일치에 대한 회의
회화에 전념하는 박미나의 미학적 관심은 언어의 의미와 형상으로서의 의미 사이에서 교차점을 찾는 데 있다. ‘의자’라고 말할 때 화자의 머리 속에 있는 의자와, 실제의 의자와, 청자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의자는 각각 어떻게 다른가. 박미나는 말한다. “칸딘스키는 ‘형상을 보면 색이 보인다’고 말했다. 주관적 느낌이겠지만, 음악과 색, 언어와 형상을 연결하는 고리를 찾는 데 재미를 느낀다.”
그가 최근 발견한 연결고리는 장식문자 내지 그림문자로 번역되는 딩뱃(dingbat) 폰트. 컴퓨터에 쉽게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딩뱃폰트는, 예컨대 자판에서 ‘abcd’나 ‘ㄱㄴㄷㄹ’을 치면 딩뱃폰트의 종류에 따라 ‘꽃, 나비, 사슴, 곤충’ 등 자의적으로 연결된 특정 이미지가 화면에 출력되는 그림서체다. 그러므로 작품명 ‘WwwFreshcopyrunntungddddfJMNMNPQEQ’엔 저 각각의 알파벳에 해당하는 딩뱃 이미지들이 틀림없이 그려져 있다. 다만 스토리가 있는 것처럼 치밀하게 배열돼 있을 뿐이다.
기존의 딩뱃폰트를 다운로드해 쓰는 것처럼 그는 물감도 기성제품을 사다가 섞지 않고 사용한다. “마르셀 뒤샹과 존 케이지 이후,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게 두 작가의 기본명제이므로, 소스(source)는 절대 변경하지 않는다. “나는 사회적 물감으로서의 물감에 관심이 있다. 이미 제조된 색을 섞어놓고 새로운 색을 창조했다고 하는데, 그건 창조가 아니라 선택일 뿐이다.” 물감의 사회사에서 최근 5년은 반짝이와 형광색의 시대다. 지상의 ‘거의’ 모든 물감을 수집해 골라 쓰는 박미나의 이번 전시작엔 그래서 형광색과 펄감이 지배적이다.
◆Sasa[44]: ‘걸어다니는 사건백과’
사진ㆍ영상ㆍ설치작품에 주력하는 Sasa[44]는 다양한 사건들의 수집과 재배치를 통해 ‘미술로 쓴 사회사’를 선보여왔다. 이른바 인물ㆍ연도 시리즈. 인물로는 조용필과 패리스 힐튼, 우디 앨런이, 연도로는 1996년과 1980년이 테마로 사용된 바 있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은 1986년. 어린 Sasa[44]의 심중에 강렬하게 맺힌, 축구천재 마라도나가 월드컵 8강전에서 손으로 골을 성공시킨 ‘신의 손’ 사건이 있었던 해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챌린저호 폭발, 보스턴 레드삭스의 ‘밤비노의 저주’, 체르노빌 원자로 폭발 등 86년의 주요 사건들이 ‘결정적 순간’의 한 장면으로 전시장에 걸렸다.
“모두 고유명사가 된 사건들, 역사에 찍힌 사건들이다. 1986년도 신문과 보도자료들을 전부 찾아보면서 공부를 엄청 했다. 그 중 3~5% 정도가 작품에 반영된다. 내 관심은 한국과 미국, 일본의 역사다. 내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성인 키를 훌쩍 넘는 커다란 사진들은 작은 사진을 소스 삼아 컴퓨터로 그린 것들. 소스는 어디선가 사용되던 이미지를 어딘가에서 주워다 재활용한 것이다. 작품에 삽입된 짧은 텍스트는 별개의 사건과 인물들로부터 차용했지만, 절묘하게 이미지와 들어맞는다.
1층 전시장 한가운데엔 대장장이가 직접 만든 커다란 망나니 칼이 바닥에 꽂혀 있다. 날카롭게 날이 선 이 진짜 칼은 “전시장의 맥을 뚫어주기 위해” 꽂은 Sasa[44]의 작품이다. 이것도 미술이냐고? 그럴까봐 서두에 밝혔다. 이것은 ‘현대’ 미술이라고.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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