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고 있는 연구실은 말 할 것도 없고, 여느 회사의 사무실의 풍경을 떠올려 봐도 공통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있다. 그게 뭐냐? 켜 놓고 작업 중인 컴퓨터와 컴퓨터 모니터 주변에 돌려가며 따닥따닥 붙여 놓은 노란색 혹은 분홍색 사각형 포스트잇이 만들어 내고 있는 묘한 분위기다. 컴퓨터와 종이 쪼가리의 동거상황이다.
볼펜이나 색연필로 깨알처럼 적어 놓은 여러 가지 내용들, 오늘 스케줄, 작업 내용, 약속, 전화번호 등등 정말 종이 위에 펜으로 긁적이며 하는 전통적인 작업 형태가 컴퓨터와 희한하게 잘 어울리는 것이다.
사실 메모 종이를 순간순간 그렇게 붙여 놓아도 어떤 때는 컴퓨터 모니터에 빠져 작업을 하다 보면 미처 해야 할 일을 놓쳐버리기 일쑤다.
요즘은 몇몇 프로그램이 포스트잇을 대신하는 기능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역시 작업 중 갑자기 전화를 받으면서 메모를 하고, 또 그 일을 곧 처리를 해야 할 경우 책상 위의 사각형 색종이를 찍 뜯어 내용을 갈겨쓰고 모니터 가장자리에 턱 붙여 놓는 것이 편한 방법이다.
멀티 태스크를 요구하고, 시간에 ?기고, 컴퓨터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요즈음의 노동 환경을 증명해주는 것 같아 썩 좋은 기분만은 아니기도 하다.
그러나 가끔 인간미 느껴지는 메모가 그 좁아터진 모니터 가장자리에 빌붙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은 또 다른 해석학적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요즘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적인 감성의 공존을 의미하는 ‘디지아나’라는 표현이 잘 들어맞는 것도 같은 장면이다.
국회 방송통신특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지상파텔레비전방송의 디지털전환과 디지털방송의 활성화에 관한 특별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12년 12월31일 이전에 지상파 아날로그 텔레비전 방송 종료를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제 텔레비전까지 아날로그 방식이 사라지고 인터넷과 함께 디지털 텔레비전이 곧 안방을 점령하게 된다는 말인데, 지금까지 고집스레 이어왔던 아날로그 세상과는 영원히 결별을 해야 하는 상황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아날로그 방송에 비해 6∼7배 높은 고화질·고음질 방송과 TV를 이용한 전자상거래인 티-커머스 등의 서비스가 촌스러운 아날로그를 밀어내고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내가 책을 읽으면서 중간 중간에 메모를 해서 끼워 놓은 포스트잇이 몇 년 동안 떨어지지도 않고 지금까지 색만 좀 바랜 채로 붙어있는 모습은 일이 끝나면 바로 쓰레기 통으로 들어가는 하루살이 인생의 모니터에 붙어있는 포스트잇과 비교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더 나은 팔자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들의 동거는 말 그대로 공존, 공생이고, 좀 더 나가면 시너지면서 동시에 공감각적이다.
남자 여자의 동거나 정치적 동거도 그럴 것이다. 서로 상반되는 것이 같이 있는 상황은 갈등을 야기할 수도 있고 조화롭게 공존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세상의 흐름은 갈등과 조화가 두 바퀴를 이루며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디지털 첨단 기술과 아날로그적 감성의 공존, 그리고 디지털 시대에서 아날로그적 사고의 회복이 필요한 이유다. 50년 이상을 이어 온 아날로그 TV가 사라진다는 약간의 아쉬움과 디지털시대에 대한 또 다른 기대를 하면서 떠올려 본 단상이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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