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의 섭정시대인가 뉴 제네레이션의 등장인가.
러시아가 8년의 푸틴 집권을 끝내고 메드베데프(42) 대통령 시대를 열었다. ‘푸틴의 꼭두각시’라는 시각과 ‘친서방 자유주의자’라는 상반된 평가 속에 5월 크렘린의 권좌에 오르게 되는 젊은 새 대통령의 발걸음에 국제사회가 숨죽이고 있다. 푸틴 대통령의 ‘강한 러시아의 부활’ 노선으로 형성된 미ㆍ러 신 냉전 체제가 메드베데프의 등장으로 새로운 변화를 맞을 지 주목된다.
러시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3일 “러시아 대선 개표가 99.45% 완료된 시점에서 여당인 통합러시아당 후보인 드리트리 메데베데프 제1부총리가 70.23%를 득표했다”며 “메드베데프가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선언했다. 경쟁자인 공산당의 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 후보는 17.76%를 득표해 2위를 차지했고 자유민주당의 블라디미르 지리노브스키와 민주당의 안드레이 보그다노프는 각각 9.37%와 1.29%를 얻었다.
비공산당, 비 KGB 출신의 첫 대통령
예상대로 메드베데프의 싱거운 승리였다. 메드베데프는 푸틴 대통령의 지원 하에서 푸틴의 후계자로 일찌감치 낙점돼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됐다. 무명에 가까웠던 그의 압승은 푸틴의 국민적 지지가 여전히 강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3선 연임 제한 규정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하는 푸틴의 권력 공백을 메울 꼭두각시라는 얘기도 이런 맥락에서다. 8년만의 권력 교체지만, ‘푸틴 시대’의 종언이라기보다 ‘푸틴 2기’의 성격이 짙다는 관측이다.
하지만 이번 대선이 러시아 사회의 변화를 시사하고 있는 면도 적지 않다. 헌법이 정한 대통령 임기에 따라 처음으로 권력교체가 이뤄졌고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비 공산당, 비 국가안보위원회(KGB) 출신의 첫 지도자가 탄생한 것이다. 록 음악과 청바지 등 서구 문화의 수혜를 입은 메드베데프는 언론자유와 시장경제에 대한 소신을 가진 법률가 출신이다.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였던 니콜라스 2세 이후 최연소 지도자다. 러시아를 장악해왔던 KGB 인맥을 대신해 90년대 초 러시아에서 태동한 젊은 ‘리버럴 그룹’이 러시아 정치권의 주류로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대외 관계 유화적 변화 가능성
이 같은 배경에서 무엇보다 대미 관계의 변화 가능성에 국제적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란 핵 문제, 미국의 동유럽 미사일방어(MD)계획, 코소보 독립 문제 등 각종 국제 현안을 두고 러시아와 미국은 ‘신냉전 시대의 도래’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사사건건 맞붙어 국제적 긴장이 고조돼왔다.
이런 상황에서 친서방 성향의 메드베데프가 양국 관계 개선의 지렛대가 될 수 있지 않냐는 기대가 적지 않다. 실제 메드베데프는 강경 일변도의 푸틴과 달리 최근 “미국과 협력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며 유화적 태도를 보여왔다. 특히 당선 직후 인터뷰에서 “러시아의 외교정책은 대통령 고유권한”이라며 독자 노선을 시사하는 발언을 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양두 정치의 실험
그렇다고 당장 급격한 변화를 기대하기는 성급하다는 평가다. 푸틴의 영향력이 막강한 상황에서 메드베드프의 독자적인 행보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메드베데프도 이날 “푸틴 대통령이 닦아놓은 길을 따를 것”이라며 푸틴의 후계자임을 분명히 했다. 푸틴 대통령도 메드베데프의 당선을 축하하면서 “이번 승리는 지난 8년간 우리가 걸어온 도정에 대한 강력한 신임으로서 앞으로도 그 길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은 푸틴 시대라는 얘기다.
AP통신은 그러나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을 쫓아낸 푸틴처럼 러시아 정치사에서 후계자들이 종종 자신을 지지해준 전임자들을 제거하는 전례를 보여왔다”며 “대통령이란 막강한 권한을 가진 메드베데프가 푸틴의 그늘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메드베드프 대통령-푸틴 총리라는 기묘한 양두 정치 시대를 맞은 러시아가 자칫 구세대와 신진 세대간 권력 갈등에 휩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송용창 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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