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을 꼬리 없는 유인원에 빗대는 야만적 편견은 미국사회에서 거의 사라졌다. 그런 비속어는 금기다. 대선 레이스에서 오바마가 선두에 오른 것도 이런 사회적 진보의 산물이다.
그러나 최근 심리학자들은 오랜 인종 편견이 잠재의식에 남은 흔적을 실험을 통해 입증했다. 연구자들은 명문대 백인 남학생들에게 남성 얼굴사진을 반짝 스치듯 보여준 다음, 흐릿한 유인원 스케치의 실체를 얼마나 빨리 판별하는지 측정했다. 미리 보여준 얼굴이 흑인일 때 가장 빨랐다. 백인과 아시안 얼굴은 인지반응 속도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 이기심 숨긴 ‘편중인사’ 비판
미국 심리학회 <사회심리학 저널> 에 실린 연구 요지를 흥미롭게 읽은 것은 우리사회의 ‘고소영’ 논란이 이런 편견의 사회심리학과 무관치 않은 듯해서다. 주제 넘지만, 나름대로 유추한 ‘고소영’ 논란의 심리학은 이렇다. 사회심리학>
청와대 수석 인사에 대뜸 ‘고소영’을 외친 이들은 대학 교회 지역 등의 연고에 얽매인 인사를 개탄했다. 그러나 기실은 사회의 뿌리깊은 연고의식과 편견을 자극해 일깨우는 작용을 노렸다. 흑인 얼굴사진과 같은 도구로 ‘고소영’을 쓴 셈이다. 스스로 의식 깊이 박힌 연고의식과 이기적 동기가 발동했으면서도, 공공을 위한 비판인양 가장한 것이다.
해괴한 사이비 심리학이라고 비웃을 것이다. 행적이 누추한 장관 후보들을 내세우는 바람에 민심마저 등 돌린 마당에, 뒤늦게 ‘고소영’ 논란의 진면목을 헤아리는 것은 부질없게 비친다. 그러나 국정을 책임질 이들의 자질을 검증하는 과제와 달리, 지연 학연에 교회 인연까지 억지로 끌어대는 논란이 이성적인지 살필 필요가 있다. 앞날의 사회 전체 평화를 위해서다.
청와대 수석에 고려대와 영남 출신, 소망교회 신도 몇몇이 들어있다고 ‘고소영’ 편중을 떠든 것은 생뚱 맞다. 대통령 측근의 10명도 안 되는 참모 구성에 지연과 학연 따위를 두루 고려한 안배가 지당한 양 말하는 것은 우습다. 골고루 나누면 좋겠지만, 그게 필수인양 강변하는 것은 동서고금 사리에 어긋난다.
장관 인사에 다시 ‘고소영’을 언급한 이들은 숫제 사리분별을 버린 듯했다. 수석과 장관 후보 24명 가운데 고대 출신이 4명으로 서울대 11명인가 다음으로 많다는 지적은 도대체 뭘 얘기하는지, 인지능력이 의심스럽다. 한신대 윤평중 교수가 칼럼에서 논평한 ‘서울대 독점’을 굳이 논하지 않더라도, 우리사회 엘리트 조직에서 고대 출신 비율이 그 정도면 평균 아래일 것이다.
장관 후보들의 사퇴 회오리가 지나간 뒤에도 ‘고소영’ 타령은 이어진다. 총리와 장ㆍ차관을 합쳐 54명 가운데 고대 출신이 6명 뿐이라면서도, 요직을 두루 차지했다고 덧붙인다. 또 인구 대비조차 없이, 영남 출신이 3분의 1이나 되는 반면 호남은 20%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영남 비율이 DJ 시절보다 크게 늘었다면서, 정작 DJ 정부의 영ㆍ호남 비율은 언급하지 않는다. 이처럼 조리 없이 잡다한 시비는 어느 정부든 대통령의 출신 배경에 따라 핵심 인적구성이 크게 다를 수밖에 없는 이치에 눈감고 있다.
■ 사회적 권력다툼에 초연해야
정권을 놓친 정치세력의 억한 심사와 언행은 이해한다. 그러나 언론과 지식인 집단까지 한통속으로 국민 화합 등의 대의와 거리 먼 논란에 매달리는 꼴은 보기 흉하다. 그 바탕은 나라와 국민이 아닌 자신의 입지와 기득권을 위해 방어선을 치는 심리다. 그런 왜곡된 이기심이 제 피부색은 잊은 채, ‘고소영’을 유인원처럼 야만스러운 무리로 부각시키는 무모한 수작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왕조 시대처럼 대권이 변동하거나 정쟁에서 밀리면 곧장 낙향, 은둔 수양하는 세상은 아니다. 그러나 고상한 명분을 쳐들수록 권력다툼에서 멀리 떨어져 사심 없는 비판과 탄핵을 해야 옳다. 시대를 넘어서는 도리와 원칙을 저버리는 무리가 많으니 “전쟁은 끝났는데 전투는 계속된다”는 탄식이 들리는 것이다. 무질서한 각개 전투는 개인과 사회의 안녕을 해칠 뿐이다.
강병태 수석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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