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세종)은 밤늦게 진양대군(후일 수양대군ㆍ세조)과 안평대군 두 아들을 불러 들였다. 책상 위에 놓인 종이에는 임금 君자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이 글자를 소리내 보아라.’ 진양이 입을 오므리고 힘주어 소리를 냈다. ‘군!’ 대왕은 유심히 아들의 입 모양을 살폈다. 안평에게도 똑같이 해보라고 했다. 이어 어찌 那자를 쓰고 발음해 보라고 했다. 진양이 이번에는 입을 한껏 벌리고 혀를 바짝 끌어당겨 소리를 냈다. ‘나…!’.” 월탄(月灘) 박종화(朴鐘和) 선생의 역사소설 〈세종대왕〉의 한 대목이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이 대목은 창작이다. 어느 역사 기록에도 이런 내용은 없다. 그저 〈세종실록〉 세종 20년 11월 23일조에 “(세종은) 날마다 세 차례씩 세자와 함께 식사하는데 식사를 마친 뒤에는 대군들에게 책상 앞에서 강론하게 하고 진양대군에게 공부를 가르친다”고 한 부분을 토대로 월탄이 상상력을 한껏 발휘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자들끼리는 이런 걸 ‘초를 친다’고 한다. 원래는 ‘한창 잘 되고 있거나 잘 되려는 일에 방해를 놓는다’는 뜻이지만 기자들은 ‘사실이 아닌 내용을 약간 첨가하여 기사 내용을 좀더 그럴 듯하게 만든다’는 뜻으로 쓴다.
■그러나 초는 살짝 쳐야 한다. 너무 많이 치면 요리를 망친다. 이순신 장군이 적의 유탄을 맞고 죽어가면서 부하들에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했다는 기록도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월탄도 말하자면 소설에서 역사에 초를 친 것이다. 다만 그 초가 달인의 수준이었기에 독자들은 사실 관계를 따지기보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해 가는 생생한 과정을 그렸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이 아니라는 실망은 생생한 묘사라는 감탄으로 바뀐다.
■그런데 요즘 인기가 대단한 KBS 역사드라마 〈대왕 세종〉을 보고 경악했다. ‘역사’와 ‘드라마’의 균형이 너무 깨져서 역사를 왜곡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후일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이 어려서부터 세상을 구제할 원대한 뜻을 품었고, 이에 세자(양녕대군)를 미는 두 외삼촌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음해를 해서, 결국 형(양녕)이 아버지 태종이 보는 앞에서 동생(충녕)의 목을 칼로 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등등 말도 안 되는 소리 투성이다. 역사라는 이름에 시청률의 상당 부분을 기대는 드라마가 학생들에게 엉터리 역사를 각인시키는 것은 죄악이다. 역사 드라마 작가 분들의 깊은 성찰을 촉구한다.
이광일 논설위원 ki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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