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각국의 부호와 기업 최고경영자(CEO) 등 지도층이 리히텐슈타인, 모나코, 안도라 등 조세회피 지역(Tax haven)을 이용, 탈세를 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유럽 사회가 들끓고 있다.
독일 정부가 이달 초 리히텐슈타인의 최대 은행인 리히텐슈타인엘게테(LGT)의 고객 정보를 입수, 탈세 수사를 시작하자 영국도 독자적으로 수사에 나서는 등 각국 정부의 탈세 수사가 이어지고 있다.
■ 확산되는 탈세 수사
26일 AP통신 등에 따르면 영국은 LGT의 전직 직원에게 19만 6,000달러(약 1억 8,000만원)를 주고 영국인 고객 100여명의 계좌 정보를 입수했다.
대기업 CEO, 상속자 등 영국 최상류층에 속하는 이들 고객은 LGT 계좌를 이용해 거액의 탈세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국세청(HMRC)은 적어도 1억9,000만 달러(약 1,700억원)를 추징, 회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도 자국 국민의 탈세 관련 정보가 포함돼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영국에 앞서 LGT 계좌 개설 고객의 탈세 수사에 착수한 독일 정부와 접촉하고 있다. 독일의 재무성 대변인 도르스텐 알비그는 이날 “LGT 고객 계좌 정보를 요청해온 국가에 대해 유럽의 투명성 확보 차원에서 무료로 정보를 공유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이달 초 독일 연방정보국(BND)이 LGT의 또 다른 전직 직원에게 500만 유로(약 69억원)를 주고 1,400명의 고객 정보가 담긴 CD를 입수하면서부터 LGT 고객 탈세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BND는 이 중 독일인 고객 600명이 모두 60억 달러(약 5조 5,000억원)의 조세를 포탈한 사실을 확인하고 혐의자에 대한 압수수색을 준비하고 있다.
■ 목소리 커지는 금융 투명성 강화
리히텐슈타인을 비롯해 모나코, 안도라 등 유럽 3국은 서울시보다 작은 면적에 인구 2만~3만명에 불과한 소국이면서도 외국의 부호나 대기업 CEO 등을 상대로 세제 혜택을 부여하고 비밀을 보장하는 금융 서비스를 제공해 막대한 부를 쌓아왔다.
지난해 리히텐슈타인의 국내총생산(GDP)의 30%를 금융업이 차지했고, 15개 은행이 벌어들인 순이익 269억 유로의 대부분이 해외 고객 자산 유치에서 나왔다. 유럽 각국은 이들 국가가 수백 년의 전통을 가진 입헌군주국이거나 합법적인 정부라는 점을 감안해 탈세 문제를 눈감아왔다.
그러나 유럽 각국이 유럽연합(EU)으로 통합되는 단계에 접어드는 것을 계기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금융 투명성 강화를 요구하면서 이들 지역에서의 탈세 문제가 현안으로 부각됐다.
OECD는 2005년 리히텐슈타인, 모나코, 안도라 등 3개 국가를 금융 개혁에 비협조적인 조세 피난처로 발표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깨끗한 정치를 강조하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리히텐슈타인을 대상으로 독일 고객의 탈세 수사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는 조세 회피 국가들이 금융 투명성을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기준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결말을 맺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독일 정부의 수사 초기에 주권 침해라며 불만을 표출했던 리히텐슈타인의 실질적 통치자 알로이스 필립 마리아 왕세자는 최근 “법과 제도를 국제 기준에 맞게 개정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독일 법률 회사 리히터 파트너의 프란츠 빌레펠드 사장은 “독일 정부의 리히텐슈타인에 대한 탈세 수사는 모나코와 안도라에도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향후 세계의 검은 돈이 바하마, 버뮤다 등 다른 조세 회피 지역으로 옮겨갈 것”으로 전망했다.
■ 조세회피지역이란
법인이나 개인의 발생 소득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지 않거나 세율이 15% 이하인 국가나 지역. 거래 비밀이 철저히 보장되기 때문에 법인, 본국에서 송금한 돈을 여러 계좌에 넣었다가 빼는 수법 등으로 자금 추적을 피해 탈세할 수 있다. 한국의 국세청은 조세회피 지역에서 한국 기업이 투자해 배당 소득 등을 얻었을 경우 국내에서 얻은 소득으로 간주해 과세하는 등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이민주 기자 m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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