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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8) 연극 주인공인 동기 불의의 사고로 죽음…대타로 무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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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8) 연극 주인공인 동기 불의의 사고로 죽음…대타로 무대에

입력
2008.02.25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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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봄. 봄...봄... 봄이다!

집에서 쫓겨난 그 해 겨울은 너무도 추웠고 배고팠다. 나에게도 봄이 오고 있었다. 매우 특별한. 그러나 나는 모르고 있었다.

미아리 산꼭대기 판자촌, 다 무너져가는 판자 집 한 자취방. 지붕 위 썩은 판자들 틈새로 겨울 내내 얼어있던 검은 들이 쉴 새 없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눅눅하고 냄새나는 이불 속, 이가 우글거려 도저히 잠들 수가 없다. 둥지를 튼 곳은 월 3,000원 셋방이다.

내 걱정을 가장 많이 해 준 사람은 막내누나였다. 내가 집에서 쫓겨난 다음날 막내누나는 출근도 하지 않고 나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서 받은 알토란같은 첫 월급봉투에서 방을 구해준 것이다.

집에서는 서쪽으로 달리면 남산이었다. 이제는 동쪽으로 달려야 남산이 보인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갈 곳은 남산 어귀, 방송국 밖에 없었다. 달리다 보면 친구도 지나간다. 일가친척도 지나간다. 나는 그냥 달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멀리서 통금소리가 멀어지며... 쓰러지듯 눕는다. 천정에서 쥐들이 나를 잡아먹으려는 듯 시끄럽게 들끓는다. 쥐똥이 쏟아진다. 똥물이 내 얼굴 위로 떨어진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쥐새끼들에게 잡혀먹지 않겠노라고 눈알을 크게 뜨고, 꽁초를 빨아 그놈들을 향해 내뿜는다.

어느덧 다음 기수인 6기생들이 들어왔다. 국립극단 배우인 최불암, 박근형, 오지명 등이 특채로 들어왔다. 경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선배들 심부름하는 것도 견디기 힘든데 후배 심부름까지 해야 될 판이다. 동기 중 문오장, 백일섭 등은 김승호선생과 최고인기드라마 실화극장 <돌무지> 에서 이미 자리를 잡았지만 나를 비롯한 몇 명은 그냥 열심히 방송국만 들락거리고 있었다.

가장 친한 동기생 이정길이 사태 파악을 끝냈다. 군대를 다녀와서 다시 시작하겠다고 하였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정길이 그의 모교 서라벌예대(중앙대) 졸업생들이 만든 ‘실험극단’에서 연극을 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인생은 가끔 스핀을 먹는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 스핀에 올라탔다.

작품은 영국의 존 밀링턴 싱 작 <서쪽나라의 장난꾸러기> . 타이틀 롤은 동기생 권창안이 맡았다. 나는 오디션을 받았으나 배역을 얻지 못했다. 연출자 문고헌씨는 무대감독 조수로 프롬터를 맡겼다. 그런 건 상관 없었다. 그냥 팀에 낀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연극무대를 직접 경험한다는 기쁨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심장이 텅텅거렸다.

6개월의 연습기간은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국립극장 작은 연습실에서 연기자들과 스태프들의 심부름을 하며 모든 연기자의 대사를 몽땅 외워버렸다. 내 대본은 하도 주물러대어서 낡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방송국 각 부서에서 잔심부름했던 경력이 찬연하게 빛났다. 손가락만 들어올려도 무슨 뜻인지 알고 해결해 냈다. 분장, 미술, 소품 인건비도 대폭 절약할 수 있었다. 모두가 나를 찾느라 바빴다. 나의 날아 가버리고 있던 자신감이 빠르게 되돌아오고 있었다.

8월 26일.

무대를 세우고 총연습을 멋들어지게 마쳤다. 다음 날 아침이면 이정길은 입대를 위해 논산으로 떠난다. 그리고 밤이 되면 마침내 연극이 무대에 오르게 된다. 그날 밤, 우리 셋은 서로의 행운을 기원하며 무교동 막걸리 집에서 정신없이 마셨다.

우리의 뜨거운 마음을 식혀주려는 듯 여름비가 무섭게 쏟아졌다. 셋은 장대같은 빗속에서 미친 듯이 춤추고 노래하며 광화문 한복판을 달렸다. 그리고 우리를 보고 빙그레 웃고 있는 이순신 장군께 달려가 키스하며 껴안았다. 셋 모두 성공하여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나와 권창안과 이정길은 이렇게 신나게 세 갈래로 헤어졌다.

다음날, 새벽같이 남산방송국으로 뛰었다. 흥분이 되어 한잠도 자지 못했다. 빨리 제작부 청소를 마치고 국립극장으로 가서 준비를 해야 했다. 현관을 재빠르게 달려 들어가는데 수위아저씨가 급히 불러 세우곤 조간신문을 보여주었다. ‘이 사람 우리 방송국 탤런트 아니야? 권창안? ’ 나는 펼쳐진 신문을 보다가 숨이 막혔다.

<어젯밤 폭우로 축대가 무너져 일가족 압사> .

타이틀 아래 친구 권창안 사진이 있었다. 몇 시간 전에 헤어졌는데... 몇 시간 전에만 해도... 반드시 성공해서 다시 이순신 동상 앞에 서자고 했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창안아...!, 창안아...!’

이정길도 떠나고 없었다. 단원들은 그의 유해를 홍제동 화장터 근처 산에 부슬비를 맞으며 쓸쓸히 뿌렸다. 회색으로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권창안은 떠났다. 그리고 ‘서쪽 나라 장난꾸러기’ 만 남았다.

오늘, 연극 ‘서쪽나라의 장난꾸러기’의 주인공배우가 죽었다, 없다. 이미 표는 다 팔렸다. 막은 올려야 한다. 극단과 국립극장에서 비상회의가 열렸다. 방법이 나왔다. 주인공 대사를 주인공보다 더 잘 외우고 있는 사람이 있다. 프롬터!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연출자가 물었다. “OK?” 나는 짧게 답했다. “OK!”

그날 국립극장 저녁7시. 캄캄한 무대의 막이 서서히 올라간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서쪽나라의 장난꾸러기, 금발의 하명종이 깔깔거리며 무대 중앙으로 뛰어나온다. 객석은 꽉 찼다. 그러나 내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랑하는 친구 권창안은 그렇게 나를 무대 위에 세워놓고 떠났다.

‘창안아, 사랑한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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