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렐 대처 울리히 지음ㆍ윤길순 옮김동녘 발행ㆍ491쪽ㆍ1만8,000원
“해부는 아주 면밀하게 이루어졌다. 가벼운 것(폐를 가리키는 말)의 왼쪽 잎사귀에 염증이 많이 생겼고, 창자도 마찬가지였다. 창자에는 네 개의 교차점이 있었고, 신장과 쓸개에도 염증이 있었다.”(283쪽) 1801년 2월 그는 병마와 싸우다 숨진 한 아이의 시체까지 해부한 뒤, 곧 딴 집에서 다섯번째 아이를 받아 주고 수고비를 받았다고 기록했다.
유럽 대륙과 신대륙 정착자들 간의 대립도, 원주민(인디언)들과의 갈등도, 역사에 대한 거대 담론도, 당대를 지배한 사회적 문제도 여기에는 없다. 의사라는 특수한 사람의 눈으로 정치와 경제 속에서 함몰되기 십상인 개인, 특히 주목 받아보지 못한 삶들을 정확히 기록해 역사의 의미를 새긴다. 1991년 퓰리처상 역사 부문과 미국의학사학회상 9개상을 석권, 미시사(微視史)의 걸작으로 떠오른 책은 여인의 섬세한 시선으로 역사와 인간을 생각해 보게 하는 텍스트다.
책에 간직돼 있는 것은 미국 뉴잉글랜드 할로웰에 살던 산파 마서 밸러드가 기록한 27년(1985~1812년)의 세월이다. 구대륙 유럽을 완전히 벗어난 세계에서 구축되는 현실의 질량감이 200년을 사이에 둔 두 여인의 시선을 통해 살아난다. 1785년 숨지기 전까지 메사추세츠 주의 한 마을에서 800여명의 아기를 받으며 마을에서 큰 존경을 받았던 마서 무어 밸러드, 그녀가 꼼꼼히 기록한 일기를 파고 들어 1991년 소설 뺨치는 세계를 구축해 낸 역사학자 로렐 대처 울리히가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사실 과학 일지에나 적합할 밸러드의 건조한 문체에 8년의 공을 들여 따뜻한 피를 수혈한 울리히가 없었던들, 원래의 텍스트는 우수마발을 기록한 고문서 취급이나 받기에 딱 좋았다. 조악한 잉크를 깃털 펜에 묻혀가며 기록한 내용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사학자는 할로웰 일대에서 찾아낸 수천건의 문서를 파고 또 팠다. 열악한 여건 속에서 끝없이 아이들을 받아야 하는 일상에 지쳐 “내 인내심이 고갈되지 말기를, 내가 고통 받은 날만큼 좋은 날을 보(315쪽)”게 되길 바란다는 밸러드의 비원에 깊이, 학자적으로 감응했던 것이다.
그렇게 ‘발견’된 이 책은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다시 씌어지는 미국 건국사다. 당시 산모 사망률, 지도 등 관련 자료는 물론 민간 의료, 살림살이, 신앙 생활, 가족 관계, 노동 방식, 결혼ㆍ구애ㆍ재판 관습, 판사나 목사의 비행 등도 놓치지 않은 세밀화이다.
이 책과 관련된 정보는 저자가 직접 운영하는 웹사이트(http://dohistory.org)에 풍성히 기록돼 있다. 저자는 책의 성공에 힘입어 현재 하버드 대학 교수로 임용됐다.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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