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델 카스트로는 20세기 후반 세계사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카스트로의 쿠바는 1970년대 이후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그러나 쿠바혁명부터 반세기에 걸쳐 전개된 그의 정치적 사상적 삶은 혁명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1928~1967), 존 F 케네디(1917~1963) 전 미국 대통령, 니키타 흐루시초프(1894~1971)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등과 함께 쓴 한편의 역사였다.
59년 카스트로의 쿠바혁명은 미국의 비호를 받던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1901~73)의 몰락을 가져왔다. 바티스타가 없었다면 카스트로는 혁명이 아닌, 훨씬 편한 길로 정계에 입성했을지 모른다. 52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바티스타 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에 좌절한 카스트로는 53년 동생 라울과 함께 몬카다 병영을 습격, 바티스타에 선전포고했다.
카스트로가 이끈 쿠바 공산혁명에는 아르헨티나 출신 이방인 체 게바라의 이상이 스며 있다. 카스트로가 체 게바라를 만난 것은 망명지 멕시코에서였다. 체 게바라는 쿠바 공산혁명의 전술이 된 게릴라 투쟁의 이념적 토대를 제공했다. 체 게바라의 게릴라 혁명 이론이 몽상이 아니라는 것을 카스트로가 입증한 셈이었다.
체 게바라는 혁명을 위해 56년 11월 멕시코를 떠나 쿠바로 향한 ‘그란마’호 승선 혁명전사 82명 중 유일한 비 쿠바인이었다. 체 게바라는 혁명 후 쿠바중앙은행 총재를 지내는 등 카스트로 내각에서 활약하며 쿠바식 사회주의의 정착에 기여했지만, 65년 쿠바식 혁명의 세계 전파를 꿈꾸며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미 대통령 임기가 10번 바뀌도록 장기 집권한 카스트로는 모든 미국 정치지도자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특히 케네디 대통령 시절 미국과의 악감정은 절정에 달했다. 케네디 외교에서 가장 큰 오점으로 기록된 피그만 침공(1961년)은 취임한 지 3개월만의 일이었다. 미 중앙정보국(CIA)이 카스트로를 몰아낼 목적으로 1,500명의 망명 쿠바인 부대를 쿠바 피그만에 상륙시켰지만, 케네디가 미 공군의 지원을 취소하면서 상륙부대는 전멸했다.
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전 세계가 카스트로의 존재를 확실히 인식하게 된 사건이었다.카스트로는 미국과 소련을 핵전쟁 직전의 상황까지 내몰아 냉전체제를 굳혔다. 미 본토 145km 거리에서 소련의 핵무기로 미국을 겨누겠다는 것이었다. 케네디는 쿠바 해상 봉쇄 조치를 취하고, 터키 이탈리아의 미국 미사일을 철수하는 조건으로 흐루시초프로부터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 백지화를 이끌어냈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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