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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이름 남겨놓기

입력
2008.02.15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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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평규의 창작동화 <잃어버린 얼굴> 의 한 대목. '상봉에 우뚝 솟은 바위! 그것은 분명히 굴조개 바위의 몸뚱이였다. 그러나 날카로운 정으로 여기저기 새겨놓은 사람의 이름, 이름, 이름… 가로로 새겨놓은 글씨, 세로로 새겨놓은 글씨.

남의 이름 위에 더 굵고 깊게 새겨놓은 이름…' 흔한 풍경이었다. 10~20년 전만 해도 국내 명승지의 바위는 물론 나무, 건물, 담에 누군가 '다녀갔다'는 증거로 마구 써놓은 이름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자연보호, 문화재 보호의식이 높아져 한국인들의 그 버릇이 없어졌다면 착각이다. 부끄럽게도 이제는 한국인들의 이름이 유럽 곳곳의 유적지에 새겨지고 있다. '이름 써놓기'로 흔적을 남기려는 욕심은 권력자들이 더 심하다. 그들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처럼 굳이 감시를 피해 몰래 하지 않아도 된다.

합법적인 수단들이 많다. 가장 흔한 방법이 기념식수를 하고 그 앞에 표지석을 세우는 것이다. 붓글씨로 휘호를 하거나, 새로 설립한 기관과 새로 건설한 시설에 자기 이름으로 커다란 입석을 남길 수도 있다.

▦역대 지도자 중 이름 남기기를 많이 한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재임기간이 그만큼 길었고 또 근대화를 위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워낙 그것을 좋아했다.

현충사 현판 같은 문화재에만 남긴 게 아니다, 추풍령에 있는 경부고속도로 준공기념탑과 고리원자력발전소 같은 시설에는 물론, 방방곡곡을 다니며 웬만한 시골 초등학교에는 자신의 방문을 기념하는 입석이나 휘호를 남겼다.

그것을 노무현정부는 '독재자'의 흔적과 자기과시, 오만이라 욕하며 충남 예산의 충의사 현판을 비롯해 줄줄이 내리고, 부수고, 지우려고 하다 논란을 빚기도 했다.

▦지도자들의 '이름 새겨놓기'는 자기 존재를 과시하려는 욕심의 산물이다. '내가 여기 왔노라' '내가 이것을 했노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오래도록 기억하고 칭송해 달라는 뜻이다.

숭례문 참사로 불명예 사표를 낸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2006년 복원되는 낙산사 동종에 온갖 구설에 오르면서까지 이름을 새겨넣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해 10월의 남북정상회담 기념식수 앞에 자신의 표지석을 세우려다 북으로부터 거부 당해 다시 보낸 사실이 밝혀졌다.

망신스럽고 한심한 일이다. 이름 새겨놓을 곳이 북한과 평양중앙식물원이 아니라, 우리 국민들 가슴임을 그렇게 겪고도 아직 모르는가.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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