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전 세계 패션계를 강타한 말라깽이 모델 시비를 살짝 비켜갔던 뉴욕컬렉션이 인종 문제로 시끄럽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지난 11일자 ‘런웨이에서 사라진 흑인 모델들’이라는 기사에서 2008 가을ㆍ겨울 시즌 뉴욕패션위크 기간(1~8일) 동안 흑인 모델들이 대거 자취를 감춘 것에 대해 패션계 구성원들이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내홍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이번 뉴욕컬렉션에서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 모델은 손가락을 꼽아야 할 정도로 적었다. 유명 흑인 래퍼이자 패션사업가인 숀 디디 콤이 설립한 남성복브랜드 숀존의 무대가 전원 흑인 모델로 채워진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쇼가 창백하고 마른 백인 모델들 일색이었다. 오죽하면 흑인 모델 타이슨 벡포드는 “디자이너들이 유색인종에게는 옷을 팔 생각이 없는 모양”이라고 비아냥했다.
인종 문제 논란은 뉴욕컬렉션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젤 번천 같은 톱모델을 배출한 브라질에서도 올해 초 열린 상파울로 패션위크의 런웨이 대부분을 유럽계 백인 모델이 휩쓴 것에 대해 신랄한 비판이 일었다.
하지만, 이번 시즌 뉴욕컬렉션은 지난해 9월부터 인종적 다양성 확보를 위해 수차례 협의를 거쳤음에도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에서 실망감이 더 크다.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CFDA)의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 회장이 컬렉션 직전에 모든 회원들에게 ‘패션쇼가 진정 다문화적이 되도록’ 노력해줄 것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낸 것도 헛수고가 됐다.
생각해보면 흑인 모델은 개방화시대인 21세기보다 오히려 20세기에 더 각광받았다. 1980~90년대 나오미 캠벨이나 타이라 뱅크스, 베로니카 웹은 린다 에반젤리스타, 클라우디아 쉬퍼 등 백인 모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슈퍼모델로 군림했다.
그러나 최근 포브스가 발표한 ‘2007년 모델수입 랭킹 톱 15’ 안에 든 유색인종은 흑인 리야 케베데가 유일하다. 복식사가인 홀리 알포드는 그 이유를 “지금은 유럽계 백인 소녀가 시대의 룩(look)”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남의 동네 인종 분란을 구구절절 읊는 이유는 ‘유럽계 백인 소녀’에 대한 선호가 국내 패션계라고 예외는 아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자. 수많은 유수 패션브랜드가 광고모델로 전형적인 유럽계 백인 소녀의 모습을 한 외국 모델들을 쓰고 있다. 몸값이 국내 톱스타보다 싸다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백인 여성이 입어야 더 멋져보인다는 뿌리깊은 통념이 원인이다. 우리 땅에서 대놓고 우리 모델들을 차별하는 셈이다.
유색인종 홀대를 둘러싼 책임 공방은 현재 디자이너 대 모델에이전시 간의 싸움으로 비화되고 있다. 일부 디자이너는 “모델에이전시가 다양한 유색인종 모델을 오디션에 보내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모델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디자이너이고, 백인 디자이너들이 피부색과 체형의 차이를 포용하지 않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모델에이전시 측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세계 패션계를 호령하는 디자이너들은 거의 대부분이 백인이다. 물론 이것이 백인이 더 창의적이라는 증거는 아니다. 서구문화는 옷을 통한 신체 장식을 문명화의 척도로 삼았다.
패션산업의 여명기, 하층계급에 속했던 흑인들이 디자인 같은 전문직에 도전하는 데는 상당한 제약이 있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니 결론은 하나, 아니꼬우면 선처를 기다리는 대신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을 많이 배출해 낼 일이다. 혜박 한혜진 강승현 등 톱모델들 만큼이나 해외 무대서 각광받고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디자이너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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