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하비 지음ㆍ최성숙 옮김심산출판사 발행ㆍ399쪽ㆍ1만8,000원
검은색은 불길한 색이다. 유럽을 거대한 공동묘지로 만들었던 흑사병, 장례식의 상복, 마녀와 마왕의 이미지, 가장 현대적으로는 검은 군단으로 불렸던 독일 나치스의 친위대에 이르기까지 재앙과 두려움, 상실, 사악함을 대변하는 색이 검은색이다.
동시에 검은색은 신앙와 겸손, 절제의 상징이기도 하다. 중세시대 수도사와 사제들이 속죄와 종교적 신념을 표현하기 위해 검은색 옷을 입은 것이 오늘날 기독교에 그대로 남아있고 검은색 정장은 고상한 자리에 어울리는 성장으로 여겨진다.
한가지 색 안에 소용돌이 치는 정반대의 이미지들은 그 강렬한 이율배반으로 인해 검정을 패션의 역사상 가장 모호하고 그래서 매혹적인 색의 제왕으로 끌어올렸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이 등장한다. 어떻게 검은색은 불길함과 부정의 이미지에서 누구나 선망하는 것, 즉 돈 지위 전문지식의 상징이 됐는가.
영국 캠브리지대학 영문과 교수 존 하비가 쓴 <블랙패션의 역사> 는 오늘날 검은색이 거느린 의미의 그물망을 파헤치기 위해 1,000년의 역사를 ?어내린다. 옷의 의미란 어느 정도 색의 역사이며, 의미는 역사의 추이에 따라 형성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블랙패션의>
저자에 따르면 고대의 성직자들은 10세기가 다 되도록 흰색을 주로 입었다. 그러나 동방교회의 성직자들 사이에서 검은 옷의 선호가 일었고 11세기 베네틱토 수도회는 ‘검은 수도사’라는 별칭을 얻으며 검은색을 정식 복식 색으로 정했다. 수도회의 지도부는 검은색이 흰색에 비해 더 슬프고 더 속죄의 의식에 어울린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검은색은 15세기 무렵 부르고뉴공국의 필리페왕자에 의해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됐다. 당시 왕실에서 검은색을 입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필리페의 선택은 유럽 전역에 강렬한 이미지를 심었다.
필리페는 1419년 프랑스군에게 살해된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선택한 검은색을 평생 고수함으로써 효심과 높은 도덕성, 프랑스에 대한 명예로운 위협의 선봉이 됐으며 15세기 권력과 가치의 화신이 됐다.
검은색을 입는다는 것은 또한 경제력을 통한 차별화의 수단이기도 했다. 15세기 검은옷을 만드는 과정은 색이 죽을 때까지 색에 색을 겹치는 수고로운 과정을 동반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검은색을 입는 것은 불가능했다.
검은색에 더해진 고귀한 위엄을 계승한 것은 영국 댄디즘이었다. 19세기 검은색은 귀족사회의 화려함을 천박한 자기과시로 추락시켰고, 신흥 부르주아의 도덕성에 전문가적인 권위와 세련된 태도, 즉 엘리트의 상징으로 위치를 공고히 했다.
‘색이 없는 색’으로서 주로 숨김을 의미했던 검은색은 이제 스스로를 드러내고 군림하기위한 색이 됐으며 이는 20세기 전체주의와 인종적 우월주의를 토대로 하는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즘에서 검은색을 선호하는 배경이 됐다.
책의 원제는 <맨 인 블랙(men in black)> 이다. 블랙패션의 미의식을 탐구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코코 샤넬의 업적이나 페티시 패션에 대한 힌트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다. 소설과 그림을 통해 당대의 옷차림과 유행을 추론하는 것은 복식사에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지만, 검은색 남성복의 역사를 통해 권력과 정치, 그리고 패션의 상호관계를 파악한 성찰은 주목할 만 하다. 맨>
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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