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살던 4억원 짜리 집을 1억원도 안되는 공탁금을 걸고 강제 철거했다. 재판에서 판사는 회사 편만 들었다. 창경궁에 놀러 갔는데 방화범으로 몰렸다. 법원이 추가 공탁금 1,300만원을 더 내라 하니 정부는 약자를 죽인다. 나는 억울하다."
채모(70)씨가 숭례문 방화를 예고하듯 2달 전에 쓴 '오직(죽)하면 이런 짖(짓)을 하겠는가'라는 글은 보상금에 대한 불만, 이어진 소송과 민원 과정에서의 억울함으로 가득했다.
'국보 1호' 숭례문을 앗아간 이유는 어이없게도 도시개발 보상금이라는 '돈'문제가 발단이었다. 시민들은 "얼마나 억울했는지 모르겠으나 물질에 대한 노욕(老欲)이 상상도 못할 결과를 불러온 것 아니냐"며 기막혀 했다.
철학관도 운영하고 약 배달상도 하며 평범하게 살던 숭례문 방화 피의자 채씨의 인생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은 1998년. 채씨는 경기 고양시 일산동 자택 부지가 새로 들어설 아파트 단지 출입용 도시계획 도로에 포함되자 4억원의 보상금을 요구했다. 하지만 책정된 보상금은 9,600만원. 채씨는 고양시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지만 패소했고, 고양시와 청와대 등에 수 차례 민원과 진정을 냈지만 헛수고였다. 채씨는 토지 보상 문제로 아내 이모(70)씨와도 갈등을 빚다 이혼까지 했다.
2006년 3월 일산 집이 헐리자 채씨는 20여년 간 살던 집이 헐값에 날아갔다는 분노감에 사회에 복수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알릴 방법을 모색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한달 뒤인 2006년 4월26일, 채씨는 불쑥 부탄가스 4통을 사 들고 경복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포기하고 오후 5시 창경궁으로 발길을 돌려 문정전 출입문 안쪽에서 신문지와 성냥을 이용해 부탄가스를 폭발시켰다. 다행히 창경궁 관리직원 2명과 관람객 3명이 바로 불을 꺼문정전 옆 국보 226호 명정전(明政殿ㆍ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던 장소)은 무사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채씨는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돼 같은 해 7월 서울중앙지법에서 징역 1년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고령인데다 전과가 없고, 문정전 건물이 1986년 복원돼 훼손 정도가 중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채씨는 2006년 9월 강화도로 이사한 전처의 집으로 옮겼고, 가족들은 그만 화를 삭이라고 부탁했다. 전처 이씨는 이날 "강화도에 온 뒤로는 토지 보상 문제에 대해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다"며 "'전세금도 못 내는 사람도 있다'며 불만을 갖지 말고 살자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전했다. 채씨도 겉으로는 농사를 짓고 2남2녀 자녀들이 보내주는 용돈으로 마을 노인과 어울리며 평온을 찾은 듯 했지만, 문화재에 불을 내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억울함을 풀겠다는 생각은 억누르지 못했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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