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전화에도, 6ㆍ25의 포화에도 끄떡 없이 600년을 한결 같이 그 자리를 지키던 숭례문이 엉뚱한 화풀이 방화로 한 순간에 잿더미가 됐다.
우아한 추녀 마루에 일렬로 놓여 있던 갖가지 동물 형상, 흙 인형들도 지붕이 무너져 내릴 때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악한 귀신들을 막아준다는 그 잡상(雜像)들은 어처구니라고도 부르는데, 화재로 그 어처구니들이 없어졌으니 문자 그대로 어처구니가 없다.
■ 남북관계는 '손잡이 없는 맷돌'
맷돌 손잡이를 어처구니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무거운 돌판을 겹쳐 놓은 맷돌은 어처구니가 없으면 돌릴 수 없다. 맷돌을 돌려야 하는데 손잡이가 없다면 얼마나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겠는가. 국어사전에는 어처구니가 '상상 밖의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을 뜻하는 명사로 나와 있고, '없다'를 붙여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다' 즉 어이없다는 뜻으로 쓰인다고 풀이돼 있다.
추녀 마루 위의 잡상이나 맷돌 손잡이라는 뜻이 없는 것을 보면 어원 풀이에 다소 무리가 있다 싶기도 하지만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손잡이 없는 맷돌에 끌어다 대는 것은 절묘한 상황 묘사다.
요즘 남북관계를 보면 손잡이 없는, 즉 어처구니 없는 맷돌이 떠오른다. 남북이 맷돌을 함께 돌려 경협이든, 핵 문제 해결이든 무슨 결과를 내놓아야 하는데 함께 잡고 돌릴 손잡이가 없다.
이명박 차기정부의 대북정책은 대선공약으로 내세운 '비핵 개방ㆍ3000'에 압축돼 있다.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폐기하고 개혁 개방을 하면 10년 내에 북한 주민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가 되도록 각종 지원을 한다는 것이다. 보수진영의 지원을 받는 이 당선인인 만큼 여건만 조성되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보다 더 화끈하게 대북 퍼주기를 할지도 모른다.
김만복 전 국정원장이 대선 투표 전날 몰래 방북해서 북측에 전한 메시지에는 이런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이 알아서 핵 폐기와 나아가 적극적인 개혁개방조치를 하기 전엔 이명박 정부가 북한을 상대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가 없다. 북한이 먼저 무엇을 해 주기를 멀뚱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다.
멀뚱하기는 북측도 마찬가지다. 남한 대선이 끝난 지 2개월이 다 돼가는데 공식 논평이 없다. 노동신문 등 북측 언론매체들은 '남조선의 정치정세 변화'라고 남한의 정권교체를 완곡하게 표현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8일자 노동신문은 남한의 보수적 성향 정권의 친미사대주의를 강하게 비판했으나 그 직접 대상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였다. 인권문제 등에 대해 할 말은 하겠다고 공언한 이 당선인에 대해 할 말은 많으나 애써 참는 기색이 역력하다.
한편으론 지난해 2차 남북 정상회담 후속 조치를 논의하기 위한 실무 차원의 남북대화 끈은 놓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발전시켰던 경협과 교류 등 남북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강한 의사표현이다. 하지만 이 당선인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조치를 취하지 않겠다는, 매우 수동적 태도에 머물고 있다.
■ 늦기 전에 함께 돌릴 손잡이를
어느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지 않으면 손잡이 없는 맷돌과 같은 이런 상황은 해소되기 어렵다. 이 당선인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에 정서적 거부감이 강한 보수층의 지지를 업고 있어서 북한이 달라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데 먼저 손을 내밀기 힘든 처지다.
북측은 북측대로 자신들에게 고자세로 나오는 남측의 새 정부에 먼저 굽히는 것은 자존심도 문제이지만 한번 약세를 보이면 어디까지 밀릴지 도무지 계산이 안 될 것이다.
남한의 정권교체기를 맞아 남북 간 대화의 동력과 환경이 악화된 상황에서 핵프로그램 신고 문제를 둘러싸고 6자회담을 통한 북핵해결 프로세스도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이 당선인 측은 북 핵실험을 막지 못한 점에서 햇볕정책은 실패했다고 하지만 핵실험이라는 고위험 상황을 관리하는 데 남북관계 유지가 크게 기여한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어어 하는 사이에 600년 문화유산이 불타 내려 앉았다. 어어 하는 사이에 남북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기 전에 남북은 서둘러 맷돌 손잡이를 만들어야 한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